본문 바로가기

란나 역사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ล้านนา/란나 이야기27

쁘라뚜 타패에서 발견된 비문(짜륵จารึก) 1980년대 쁘라뚜 타패 부근 성벽 공사를 새로 하면서 인근에 있던 비문을 옮겼는데, 그 동안 그 비문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몰랐다고 한다. 옮겼으면 어디로 옮겼다고 말을 해야지... 그러던 차 지난 11월 1일, 바로 타패 문 내부에서 발견하였다는 뉴스가 나온다. https://www.youtube.com/watch?v=oQUzHR_SU4w 저 천궁도는 다양한 일자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란나에서 사용되던 부적일 수도 있다. 이어져 나오는 지문의 글자들은 처음 보았을 때 저게 어디 글자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란나 글자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하던 차에... 음... 이거... 하고 찾아보니... ㅋㅋㅋㅋ 이 비문 이미 그 존재 자체는 오래전부터.. 2023. 11. 11.
16세기 혼란기, 빠이(므앙너이)가 유배지로 선택되었던 이유는? 므앙너이가 왜 유배지로 선택되었을까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란나-12-13-14대-왕들의-암살과-혼란기 란나 12, 13, 14대 왕들의 암살과 혼란기 파야 깨오가 죽기 이틀 전 이미 왕으로 내정되었던 파야 껫쳇타랏พญาเกสเชษฐราช(프라므앙껫끌라오พระเมืองเกษเกล้า)은 란나 망라이 왕조의 열 두번째 왕이 된 chaokaoli.tistory.com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가깝거나 중요 도시(파야오, 람빵, 치앙다오, 프라오, 팡, 치앙라이 등)에는 왕족이나 신뢰하는 귀족을 보내게 되는데, 왕족의 경우 죽이지는 않고 멀리 돌아오기 쉽지 않은 지역으로 보내게 된다. 이때 보낸 곳이 버마의 샨 지역인 므앙나이와 치앙 뚱 그리고 므앙 삿 등이다. 그런데 16.. 2023. 9. 9.
치앙마이-람푼 가로수 길과 도시 기둥 영상 치앙마이-람푼 가로수 길과 도시 기둥이 위치해 있는 1번 나무가 있는 싸라피 영상이다. https://www.youtube.com/shorts/4r7YFzG50VA https://www.youtube.com/shorts/i6pYQm7utPM 당시 나무 기둥이 아직 남아있을 수는 없었을테고, 나무에 금칠을 해두고 있다. 도이 수텝 오르는 길 입구에 있는 씨위차이 동상을 지날 때면 경적을 울리 듯이 이곳도 지나가는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고 지나가곤 한다. 최근에 세워진 도시 기둥을 제외하고 오래된 도시 기둥들도 크기가 적지 않다. 그에 비하면 치앙마이 왓 쩨디루앙에 있는 도시기둥은 실제 본 적은 없지만 그 외관을 보아도 그 크기가 아주 작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인지 항상 궁금하다. 2023. 6. 3.
치앙마이 왓 록몰리 옆에 있는 나레수안 동상 버마와 아유타야의 중요 북쪽 루트에 있는 치앙마이, 나레수안 역시 치앙마이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었고, 말년에 치앙마이에서 버마를 공격하기 위해 지금의 버마와 태국 국경(치앙다오, 팡)을 넘어 진군하던 중, 천연두로 추정되는 사인으로 죽고 만다. 적을 공격하던 중 죽은 왕의 시체를 뒤로 옮기지 않는 습속에 따라 죽은 자리에서 화장을 한 후 조금 더 북으로 전진한 후 탑과 함께 유해를 안치했다고 하며 이는 현재 태국과 버마의 국경 부근이 된다. 살윈강을 넘어가기 전 삼거리인 몽똔에 그 탑이 있다고 이야기하나 그 삼거리 가기 전의 태국 국경에서 가까운 쪽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자세한건 다음으로.. 암튼 그 나레수안의 동상이 치앙마이에 있는데, 바로 왓 록몰리 사원 바로 옆이다. 2023. 5. 31.
치앙마이 교도소의 슬픔 귀신 이야기는 우선 빼고, 씨암이 란나를 먹으며 진행시킨 일 중에 교도소 건립이 있다. 어디에? 일본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었듯 란나 왕궁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왕궁을 허물고 바로 교도소를 세웠던 것이다. 성벽으로 둘러쌓인 내부에 교도소를 큼직하게 건립했던 것이다. 바로 란나의 상징성을 밟아버린 것이다. 그 자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여자 죄수들의 갱생 마사지로 유명하지만 사실 역사를 보면 썩 유쾌하지는 않은 일이다. 여자 죄수들은 지금은 매땡에서 온다. 찾아가 보았다. 어딜? 매땡을? 아니 왕궁터, 위앙깨오를 찾아가 보았다. 그곳은 지금 공원화 계획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오래 전부터 철거와 함께 유적 발굴이 이루어지며 미루어지고 있다. 들어가 볼 수 있을까? 물어보았다. 1. 들어갈 수.. 2022. 12. 5.
고대 태국 전쟁 전술 문서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아직 연대를 알 수 없는 고문서입니다. 이 문서에는 태국 각 지역이 치앙마이를 기준으로 동서남북 어디에 위치하며 어떤 동물로 상징되는지 나와있기도 합니다. 이와같은 많은 자료와 문서들을 오래 전 일본이 가져갔다고 하는데 아직 발견되지 못한 문서나 보물들이 많은데 어디에 있는지 그간 개인적으로 추정하던 곳이 맞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귀한 자료와 함께 란나 문서를 많이 보여주신 도서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다시 한 번 더 꾸뻑! 2022. 12. 4.
1900년, 란나 말기 노비의 가격은? 왕족, 귀족, 평민ไพร่, 노비ทาส의 신분제는 계속 유지되어 왔는데 1900년 표시된 노비의 가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지역 남자 여자 난 62밧 62밧 치앙마이 54밧 72밧 람푼 54밧 72밧 프래 48밧 48밧 람빵 45밧 60밧 턴เถิน 42밧 64밧 번화한 도시, 번잡스러운 도시,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도시의 노비 가격이 비싸며, 남자보다는 여자 노비의 가격이 더 비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비는 소유자의 재산으로 여겨져 상속이 된다. 따라서 여노비에게서 태어난 아이 역시 그대로 소유자의 재산이 되기에 더 비싸다. 세종 때 실시된 노비종모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럼 평민과 여노비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노비가 되는 것일텐데.. 여기서 여노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노비도 부.. 2022. 9. 3.
망라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 란나에의 신분계급 유지는 출생신분을 인정하게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왕족, 귀족, 승려, 평민, 노예로 이루어진 란나의 신분, 1198년 고려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있더냐?!" 라고 외쳤던 만적, 100여년이 지나 란나에서 망라이가 답을 던진다. 망라이는 말한다. "왕족이 아니라면 왕이 될 생각을 갖지 말고, 귀족이 아니라면 관료가 될 생각을 하지 마라. 버차이 츠아짜오 꺼 야 왕뻰프라야, 버차이 츠아쎄나 꺼 야 왕뻰암맛 (버짜이 쯔아짜오 꺼 짜빠이 왕뻰쁘라야, 버짜이 쯔아쎄나 꺼 짜빠이 왕뻰암맛 ㅋㅋㅋ) บ่ใช่เชื้อเจ้าก็อย่าหวังเป็นพระยา บ่ใช่เชื้อเสนาก็อย่าหวังเป็นอำมาตย์" * 즉, "응,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어."라고... 그래서! 띨로까.. 2022. 9. 2.
치앙마이의 처음과 마지막, 위앙 깨오เวียงแก้ว 망라이 형님의 치앙마이 건설 이야기를 몇 번 다루었고 또 앞으로도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계속 다루겠지만 그 치앙마이의 마지막, 란나의 마지막은 결국 왕궁이 사라지는 것, 왕궁의 상징성이 사라지는 시점이 되었을 것이다. 치앙마이는 위앙 치앙마이 그리고 위앙 치앙마이 안쪽에 왕궁이 있는 위앙 깨오เวียงแก้ว 의 이중으로 만들어졌다. 위앙 깨오는 아누싸와리 오와빼โอวาแป๊ะ의 뒤쪽 대각선 방향에 있다. 버마 독립 후의 까윌라가 치앙마이를 복구하고 다시 입성할 때, 그는 망라이가 했던 대로 후아위앙(창프악)을 통해 성내로 들어가 치앙만에 잠시 머물다 이어 위앙깨오로 들어갔다. 이 위앙깨오가 망라이 때부터 사용되던 왕궁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 위치와 상징성 또 건물 일부 벽에서 발견된 위앙 깨오라.. 2022.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