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란나 역사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ล้านนา/란나 이야기

16세기 혼란기, 빠이(므앙너이)가 유배지로 선택되었던 이유는?

by ChaoKaoli 2023. 9. 9.
반응형

므앙너이가 왜 유배지로 선택되었을까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란나-12-13-14대-왕들의-암살과-혼란기

 

란나 12, 13, 14대 왕들의 암살과 혼란기

파야 깨오가 죽기 이틀 전 이미 왕으로 내정되었던 파야 껫쳇타랏พญาเกสเชษฐราช(프라므앙껫끌라오พระเมืองเกษเกล้า)은 란나 망라이 왕조의 열 두번째 왕이 된

chaokaoli.tistory.com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가깝거나 중요 도시(파야오, 람빵, 치앙다오, 프라오, 팡, 치앙라이 등)에는 왕족이나 신뢰하는 귀족을 보내게 되는데, 왕족의 경우 죽이지는 않고 멀리 돌아오기 쉽지 않은 지역으로 보내게 된다.

이때 보낸 곳이 버마의 샨 지역인 므앙나이와 치앙 뚱 그리고 므앙 삿 등이다.

 

그런데 16세기 란나가 버마에 먹히기 바로 전 귀족들이 득세하던 혼란기를 보면

므앙 너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곳은 지금의 빠이 인근으로 왜 이곳으로 보냈는지는 지형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치앙마이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으면서 고립되어 있는
(지도를 보면 우측으로 치앙다오, 프라오와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

또 귀족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유배보냈던 왕족 후손을 불러오기도 쉬운 지역이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치앙다오와 프라오는 팡과 치앙라이 중간으로 전쟁시 위 아래로 군사지원이 용이하였을테고

(망라이 아들들이 두 지역을 맡기도 했지만

란나의 전성기를 이룬 띨로까랏도 왕자 시절 프라오를 맡고 있다가 아버지 쌈팡깬의 군사지원 요청에 늦장 대응을 하는 바람에 지금의 매싸리앙으로 쫓겨났던 적도 있다.)

우측의 파야오와 람빵은 아유타야와의 전쟁시 중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