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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나 역사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ล้านนา94

쁘라뚜 타패에서 발견된 비문(짜륵จารึก) 1980년대 쁘라뚜 타패 부근 성벽 공사를 새로 하면서 인근에 있던 비문을 옮겼는데, 그 동안 그 비문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몰랐다고 한다. 옮겼으면 어디로 옮겼다고 말을 해야지... 그러던 차 지난 11월 1일, 바로 타패 문 내부에서 발견하였다는 뉴스가 나온다. https://www.youtube.com/watch?v=oQUzHR_SU4w 저 천궁도는 다양한 일자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란나에서 사용되던 부적일 수도 있다. 이어져 나오는 지문의 글자들은 처음 보았을 때 저게 어디 글자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란나 글자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하던 차에... 음... 이거... 하고 찾아보니... ㅋㅋㅋㅋ 이 비문 이미 그 존재 자체는 오래전부터.. 2023. 11. 11.
16세기 혼란기, 빠이(므앙너이)가 유배지로 선택되었던 이유는? 므앙너이가 왜 유배지로 선택되었을까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란나-12-13-14대-왕들의-암살과-혼란기 란나 12, 13, 14대 왕들의 암살과 혼란기 파야 깨오가 죽기 이틀 전 이미 왕으로 내정되었던 파야 껫쳇타랏พญาเกสเชษฐราช(프라므앙껫끌라오พระเมืองเกษเกล้า)은 란나 망라이 왕조의 열 두번째 왕이 된 chaokaoli.tistory.com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가깝거나 중요 도시(파야오, 람빵, 치앙다오, 프라오, 팡, 치앙라이 등)에는 왕족이나 신뢰하는 귀족을 보내게 되는데, 왕족의 경우 죽이지는 않고 멀리 돌아오기 쉽지 않은 지역으로 보내게 된다. 이때 보낸 곳이 버마의 샨 지역인 므앙나이와 치앙 뚱 그리고 므앙 삿 등이다. 그런데 16.. 2023. 9. 9.
치앙마이-람푼 가로수 길과 도시 기둥 영상 치앙마이-람푼 가로수 길과 도시 기둥이 위치해 있는 1번 나무가 있는 싸라피 영상이다. https://www.youtube.com/shorts/4r7YFzG50VA https://www.youtube.com/shorts/i6pYQm7utPM 당시 나무 기둥이 아직 남아있을 수는 없었을테고, 나무에 금칠을 해두고 있다. 도이 수텝 오르는 길 입구에 있는 씨위차이 동상을 지날 때면 경적을 울리 듯이 이곳도 지나가는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고 지나가곤 한다. 최근에 세워진 도시 기둥을 제외하고 오래된 도시 기둥들도 크기가 적지 않다. 그에 비하면 치앙마이 왓 쩨디루앙에 있는 도시기둥은 실제 본 적은 없지만 그 외관을 보아도 그 크기가 아주 작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인지 항상 궁금하다. 2023. 6. 3.
치앙마이 왓 록몰리 옆에 있는 나레수안 동상 버마와 아유타야의 중요 북쪽 루트에 있는 치앙마이, 나레수안 역시 치앙마이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었고, 말년에 치앙마이에서 버마를 공격하기 위해 지금의 버마와 태국 국경(치앙다오, 팡)을 넘어 진군하던 중, 천연두로 추정되는 사인으로 죽고 만다. 적을 공격하던 중 죽은 왕의 시체를 뒤로 옮기지 않는 습속에 따라 죽은 자리에서 화장을 한 후 조금 더 북으로 전진한 후 탑과 함께 유해를 안치했다고 하며 이는 현재 태국과 버마의 국경 부근이 된다. 살윈강을 넘어가기 전 삼거리인 몽똔에 그 탑이 있다고 이야기하나 그 삼거리 가기 전의 태국 국경에서 가까운 쪽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자세한건 다음으로.. 암튼 그 나레수안의 동상이 치앙마이에 있는데, 바로 왓 록몰리 사원 바로 옆이다. 2023. 5. 31.
치앙마이 교도소의 슬픔 귀신 이야기는 우선 빼고, 씨암이 란나를 먹으며 진행시킨 일 중에 교도소 건립이 있다. 어디에? 일본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었듯 란나 왕궁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왕궁을 허물고 바로 교도소를 세웠던 것이다. 성벽으로 둘러쌓인 내부에 교도소를 큼직하게 건립했던 것이다. 바로 란나의 상징성을 밟아버린 것이다. 그 자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여자 죄수들의 갱생 마사지로 유명하지만 사실 역사를 보면 썩 유쾌하지는 않은 일이다. 여자 죄수들은 지금은 매땡에서 온다. 찾아가 보았다. 어딜? 매땡을? 아니 왕궁터, 위앙깨오를 찾아가 보았다. 그곳은 지금 공원화 계획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오래 전부터 철거와 함께 유적 발굴이 이루어지며 미루어지고 있다. 들어가 볼 수 있을까? 물어보았다. 1. 들어갈 수.. 2022. 12. 5.
고대 태국 전쟁 전술 문서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아직 연대를 알 수 없는 고문서입니다. 이 문서에는 태국 각 지역이 치앙마이를 기준으로 동서남북 어디에 위치하며 어떤 동물로 상징되는지 나와있기도 합니다. 이와같은 많은 자료와 문서들을 오래 전 일본이 가져갔다고 하는데 아직 발견되지 못한 문서나 보물들이 많은데 어디에 있는지 그간 개인적으로 추정하던 곳이 맞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귀한 자료와 함께 란나 문서를 많이 보여주신 도서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다시 한 번 더 꾸뻑! 2022. 12. 4.
란쌍에서 온 12살의 쎗타티랏, 란나의 16대 왕이 되다. 란쌍을 떠난 쎗타티랏(차이쳇타티랏ไชยเชษฐาธิราช)은 치앙쌘, 치앙라이를 거쳐 1546년 6월 치앙마이에 도착한다. 이때 쎗타티랏을 초대한 귀족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하며 그를 왓 치앙은วัดเชียงยืน으로 초대한다. 왓 치앙은에 들러 경의를 표한 후 후아 위앙(창프악 게이트)를 통해 왕궁으로 들어가 란나의 16대 왕이 된다. 이때 쎗타티랏의 나이 12살이다. 잠시 치앙마이를 맡아 아유타야와 므앙 나이의 공격을 막아낸 찌라쁘라파는 조용히 외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외할머니가 있다 하지만 쎗타티랏에게는 낯선 치앙마이, 그를 지원하는 귀족들이 불렀다고 해도 쎗타티랏에게 실질적인 힘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란쌍에서 들려온 아버지 포티싸랏의 사망소식을 듣고 1년이 조금 지난 1547년.. 2022. 10. 3.
찌라쁘라파, 아유타야의 2차 침공에 맞서다. 1545년 7월 아유타야로 돌아간 차이라차티랏ไชยราชาธิราช,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찌라쁘라파의 조건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조건이 지켜지지 않아서였을까? 아유타야의 차이라차티랏은 믄 쑤코타이를 시켜 람푼을 공격하게 한다. 당시 람푼은 싸우자와 말자로 의견이 갈라졌는데 말자의 의견이 우세했다. 하지만 그건 너네 생각이고라고 생각한 믄 쑤코타이는1545년 12월 4일 야심한 밤을 틈타 코끼리를 타고 쁘라뚜 리를 통해 도시로 들어가 눈에 띄는 모든 사람들을 잡고,쁘라뚜 타낭에서 쁘라뚜 마하완까지 닥치는대로 불을 질러버린다. 람푼, 하리푼차이 마지막 왕 파야 이바가 불타는 도시를 보며 눈물을 흘렸는데 또 타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파야-이바가-.. 2022. 9. 28.
위기에 빛난 찌라쁘라파 여왕의 활약(1545-1546) 앞에서 쌘 크라오는 왕위를 이을 마땅한 후계좌가 없기에 치앙 뚱과 므앙 나이의 영주(군주, 왕)들에게 치앙마이로 와 왕이 되라고 한다. 이때 치앙 뚱에서는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므앙 나이에서는 오케이하고 치앙마이로 이동하게 된다. * 이때 귀족들이 왕도 죽이는 마당에 자기들이 왕을 칭하거나 아무나 내세울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말 안들었을 경우 유배로 보내기도 하는 지역의 영주들을 왕으로 불러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왕족이 아니라면 왕이 될 생각을 갖지 말고, 귀족이 아니라면 관료가 될 생각을 하지 마라." 라고 망라이가 말했던 란나를 지배하는 신분원칙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망라이-왕후장상의-씨가-따로-있다 마.. 2022.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