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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나 역사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ล้านนา/란나 초기 혼란기

망라이의 죽음-치앙마이 시장 한 가운데서 벼락을 맞다!

by ChaoKaoli 2022.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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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에서 나와 코끼리를 타고 치앙마이 시장을 둘러보던 망라이는,

갑자기 내리친 벼락에 맞아 죽고만다.

시대를 풍미한 영웅다운 죽음이었을까 아니면 영웅답지 않은 초라한 죽음이었을까?

 

출처:https://www.photodharma.net/

 

이를 두고,

장남을 죽인 것에 대한 부인의 한,

낭 파이코를 맞아들이면서 얻은 부인의 한,

하리푼차이를 불태울 때 짜마테위가 가져온 크리스탈 불상(프라 깨오카오พระแก้วขาว)이 있던 불당이 타지 않아 여러 번 불을 지른 것에 대한 응보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

출처 : http://www.virtualmuseum.finearts.go.th/

 

망라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1311년 설과 1317년 설(치앙마이 연대기)이 있다.

죽기 전 병에 걸려 위앙 꿈깜에서 요양을 하다 죽었다는 설과 치앙마이 시장에서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설 두가지가 있다. 

1311년 망라이 73세, 1317년 망라이 79세이다.

1311년이 다수의 의견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난 망라이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치앙마이 연대기의 연도를 따른다.

 

치앙라이에서 망라이의 갑작스러운 비보를 접한 파야 차이쏭크람은 바로 대군을 이끌고 치앙마이로 들어온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은 자리에 사당을 짓고 화장을 한 후 유골을 보관하며 그 자리에 반얀나무를 심는다. 

현재 치앙마이 3왕상이 있는 부근이다.

 

파야 차이쏭크람은 장사를 지내고 치앙마이에 4개월을 머물고 다시 치앙라이로 돌아간다.

 

이때 그는 장남 쌘푸에게 치앙마이를 맡긴다.  하지만 란나의 왕위를 물려준 것은 아니다.

1318년 5월 15일 월요일, 쌘푸의 나이 41살이었다.

(1256년생으로 추정되는 파야 차이쏭크람의 나이는 이때 62세)

 

그리고 둘째 타오 남투암에게는 팡을, 막내 타오 남난(타오 응와)에게는 치앙 콩을 맡긴다. 

 

 

이어서 왕권이 안정되기까지 잠시 란나의 혼란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건 다음 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그러면 정말 망라이는 벼락에 맞아 죽었을까? 아니면 병에 걸려 위앙꿈깜에서 요양하다가 죽었을까?

치앙마이 연대기에는 위앙꿈깜에서 요양하다가 죽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를 종합하여 이렇게 풀어가고자 한다.

우선 망라이가 치앙마이 시장에서 벼락에 맞아 죽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신 1311년 어떤 사건으로 요양이 필요한 상황이 되어 치료를 하다가 1317년 죽은 것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떤 사건, 상황, 질병이 있었을까?

 

난 치앙마이 연대기에 나오는 두 문장,

1. 파야 차이쏭크람이 치앙라이에서 대군을 이끌고 치앙마이로 들어오고

2. 장례를 마치고 4개월 후 치앙라이로 돌아갔다는 것에서

 

사실은 망라이가 코끼리를 타고 가다가 치앙마이 시장에서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사건이,

벼락처럼 순식간에 벌어진 망라이 암살사건이 아니었을까하는 것이다. 

1311년 암살 사건이 벌어지고 

망라이가 큰 부상을 입고 위앙꿈깜에서 요양하다가 1317년 사망,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럼 누가 암살을 실행할 수 있었을까?

주변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반감을 사고 가장 큰 전투가 벌어진 것은 켈랑 파야 벅과의 전투인 것으로 보이는데,

하리푼차이와 켈랑, 하리푼차이 사람들도 쿤 아이 파의 첩자 활동으로 인해 속아서 전쟁에 지게 된 것을 알았을테고,

또 이어진 파야 벅의 복수전과 죽음 등으로 통해 나름의 복수심이 남아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러한 복수심과 반감이 결국 망라이 암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까?

그러한 분위기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파야 쏭크람이 올 때 치앙라이의 대군을 이끌고 오고 또 바로 그의 본거지인 치앙라이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리푼차이가 라와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라와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적이 2번 있었다.

완전한 승리와 완전한 패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혼자 그려본 상상에 불과하다. 망라이가 벼락 맞아 죽었다고 하니 좀 기분이 그래서...

대군을 이끌고 왔다고 하지만 이후 3대 쌘푸가 치앙쌘에서 죽었을 때도 아들 캄푸 역시 다른 지역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치앙마이 등에서 24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치앙쌘으로 간 적이 있고 란나 역사에서 벼락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들도 몇가지 더 있다.

 

하지만 기록에 없는 역사는 상상할 수 있어 재미있다.

난 혼자서 망라이의 죽음과 이후의 혼란기를 이와 연계하여 생각해보곤 한다. 

 

누가 그건 아니라고 정확한 자료와 분석을 들고와 이야기한다면,

난 또 말할 것이다.

"쑤마떠 짜오, 네 이야기가 옳다고..."

 

암튼 망라이의 죽음으로,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삼국의 삼총사, 파야오의 응암 므앙(1298년), 쑤코타이의 람캄행(1298년, 싸완칼록สวรรคโลก 강에서 급류에 휩쓸려 사망(역시 캄푸처럼 강의 괴물 등장?) 또는 말레이와의 전투에서 사망설)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그런데 찌앙마이에서 우리 라이 형을 기리는 유적이나 기념물 등이 생각보다 허름하고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아 놀랬던 기억이 있다.

 

*여러 번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있고, 대개의 땀난은 하리푼차이를 모두 불태운 후 왕궁이 있던 자리에 가 보니 타지 않은 불당이 있어 가보니 이 프라 깨오카오가 있어 치앙마이로 가져왔다고 한다. 그래도 프라 깨오카오가 있던 불당에 불을 지른 것은 어쨌거나 맞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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