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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나 역사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ล้านนา/란나 치앙마이 건설까지

망라이, 아이 파에게 하리푼차이를 위임하고, 위앙꿈깜으로 이전하다.

by ChaoKaoli 2021.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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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푼차이를 점령하고,

2년을 하리푼차이에서 보낸 망라이는 부족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여긴 나의 꿈을 이루어 나가기엔 좀 작군."

 

아이 파를 불러 말한다.

"네가 고생이 많았다. 누구보다 이곳을 잘 알 테니 이제부터는 네가 이곳을 다스려라." *

 

시중엔 그런 말이 돌았다고 한다.

"우리가 비록 망라이에게 패했지만 문화적으로 우린 지지 않았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문화는 섞이는 법, 란나 문화와 하리푼차이 문화는 자연스럽게 섞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망라이도 이를 잘 알았을 테고, 

 

"하리푼차이는 나에게 이상적인 도시가 아니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부족함이 있다.

부처의 도시(종교, 문화의 도시)로 남겨두고 다른 곳을 찾아보도록 하자. 오케이?"

 

아이 파에게 하리푼차이를 맡기고 망라이는 위앙꿈깜เวียงกุมกาม으로 이전한다. 

1294년에 일어난 일이다.

치나깐말리 ชินกาลมาลีปกรณ์ jinakalamali에서는 1303년, 치앙마이 연대기는 1283/84 치앙 르아라는 곳에 3년 정도 머물다 1286/87 위앙꿈깜으로 이전한다고 나온다.

 

지금도 위앙꿈깜은 발굴 연구 중이니 조금 더 세부적인 연도가 밝혀지리라 기대해 본다.

참고로 치앙마이 연대기에서는 위앙꿈감 건설과 관련하여 조금 더 세부적인 내용들이 나온다. 

(치앙마이 건설 현장으로 어서 가야하니 나중에 따로 다루어 볼 생각이다.)

 

사진 출처 : https://province.mots.go.th/ewtadmin/ewt/chiangmai/news_view.php?nid=583

 

위앙꿈깜!

망라이가 벼락 맞아 죽은 것이 아니고

병에 걸린 후 이곳으로 와 몇 년을 앓다가 죽었다고도 하는 곳,

망라이가 페구에서 또 다른 젊은 부인을 얻어와 그의 부인 우아 밍 위앙차이가 화병까지 얻어 이곳의 사원으로 들어갔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 또 그로인해 망라이가 벼락 맞아 죽게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그럼 이제까지 망라이가 벼락맞아 죽게 된 이유는

1. 아들 쿤 크르앙을 죽이고

2. 새로운 젊고 예쁜 부인을 데리고 와서

3. 하리푼차이 점령 시 타지 않는 사원을 3번이나 불 질러 태워서이다.

또 다른 이유가 추가될 예정이다. )

 

치앙마이도 그렇지만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도시를 새로 건설한 것은 아니다.

기존에 이미 작은 마을이나 도시들이 형성된 상태에서 성벽을 쌓고 왕궁과 귀족들의 거주 공간, 시장 등의 업그레이드를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이미 12세기부터 마을의 흔적들이 있었다고 한다.

 

위앙꿈깜의 건설은 하리푼차이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겨진 다양한 고급인력을 투입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홍수였다. 

강가에 지은 도시는 우기 때 홍수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출처 : https://www.silpa-mag.com/history/article_6657

 

몇 차례 강의 범람을 맛보고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시 이전할 곳을 찾게 되는데,

이전에 보아 둔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도이수텝 기슭의 치앙마이! 

나 피 씨 นพีสี!

 

이제부터 치앙마이 건설 현장으로 가보자!

 

* 아이 파에게 하리푼차이를 맡겼다는 이야기 이후 그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5년 후 파야 벅이 람빵에서 쳐들어왔을 때도 별다른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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