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라는 왓 치앙만,
그 이름에 왜 치앙이 들어가 있을까요?
치앙마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라기 보다는 치앙마이 올드시티 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왓 치앙만,
건설 시기는 1297년으로 추정됩니다.
1292년 파야 망라이가 하리푼차이를 점령하고
1294년 위앙 꿈깜으로 이전한 후
홍수로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주변을 여행하던 중 현재 치앙마이 올드시티의 북동쪽에서 좋은 자리를 발견합니다.
그 자리는 이미 폐허가 된 상태지만
원주민인 라와족이 하리푼차이에 당하기 이전 시대부터 도시를 형성하며 번창했던 도시라고
라와족 원로로부터 전해듣습니다.
'좋다, 여기!'
그리고는 임시로 왕궁을 짓고는 이 지역을 치앙 만이라 부릅니다.
치앙은 도시,
만은 안정을 의미하여
안정된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 왓 치앙만에서 해자 너머로는 왓 치앙이은이 있습니다
왓 치앙이은의 의미는 안정된 도시가 오래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어 친구 수코타이의 람캄행과 파야오의 응암므앙을 불러 논의하며 치앙마이 건설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 모두 임시 왕궁에 머물게 됩니다.
왕궁 옆에는 친구들이 타고 온 코끼리나 왕족의 코끼리를 두어야 하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왓 치앙만 대각선 위치에 있는 왓 람창으로 추정됩니다.
후다닥, 왕궁을 건설하고는 7일간의 성대한 축제를 벌이고 두 친구는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가고,
망라이는 임시로 머물렀던 치앙 만을 사원에 기증하게 되고,
자신은 예전 여자교도소가 있던 자리에 왕궁을 지어 이전합니다.
치앙 만을 기증하여 받은 사원, 왓 치앙만입니다.
11세기 하리푼차이의 아티따야랏이 자신의 왕궁에서 발견된 붓다의 사리를 보고 왕궁을 사원에 기증하여
왓 프라탓 하리푼차이로 되었던 것처럼
왕궁을 사원에 기증하던 일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치앙만의 건설 시기는 1297년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296년 4월 치앙마이가 완공된 후,
우기를 거치면서 연말이 되어서는 하리푼차이의 마지막 왕 파야 이바의 복수를 위해 그 아들 파야 벅이 람빵 지역에서 치앙마이로 공격해 들어오는 일전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296년보다는 1297년이 보다 더 적합한 건설 연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전 경주 첨성대도 사람들이 올라가 찍은 사진이 있었듯이
이곳 왓 치앙만의 코끼리에도 자유롭게 올라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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