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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나 역사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ล้านนา/란나 치앙마이 건설까지

치앙마이 도시 완공 1296년 4월 19일 04:00

by ChaoKaoli 2022.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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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읍지로 정할 만한 장소를 발견한 망라이는
지역 원로들(라와족)에게 "여기 정말 살기 좋죠?"라고 최종적으로 확인을 거친 후
지금의 왓 치앙만 부근에 먼저 거의 거처 등을 건설하게 된다.
이 때가 1292년 3월 27일 목요일이다.

(이 연도는 치앙마이 연대기에 따른 연도로 치앙마이 연대기에서는 1288년 위앙 꿈깜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1296년 치앙마이 건설 연대와 차이가 많이 나므로 

개인적으로는 1294년 또는 1296년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바로 전체적인 공사를 시작하지 않고 잠시 멈추고는 그의 친구, 쑤코타이의 람캄행과 파야오의 응암 므앙을 초대하고 기다리게 된다. 그들과 상의하기 위해서라는데...
굳이 왜 그들과 상의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친한 친구사이라서? 하리푼차이 공격과 몽고에 맞서기 위해 맺은 삼국동맹 때문에?
정말 멋진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서?

치앙마이 연대기에는 이렇게 나온다.
"나 여기에 엄청나게 큰 도시를 지을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 내 친구들인 람캄행과 응암 므앙을 불러 의견을 나누어 볼 생각이다"

국민들 신망이 높은 왕인지라 한가할 틈이 없던 두 왕과는 4년이 지난 후에야 만나게 된다.
"여기가 바로 내가 찾은 신성한 장소일세,
내 여기에 각각 4000미터에 달하는 크기의 도시를 만들거네만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자네들을 초대한 이유임세"

응암 므앙이 먼저 의견을 말한다.
"난 반대일세 망라이, 4000미터에 달하는 성벽이라니.. 언빌리버블...너무 커"

람캄행도 말한다.
"어이 어이 너무 커. 응암이의 말에 나도 공감하네. 너무 크면 나중에 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 수비하기가 어렵네.
그리고 예전 쑥단타 등의 르씨들이 왜 하리푼차이를 그 정도 크기로 만들었나도 생각해보게나. 자네들도 우리동네 쑤코타이*에 와서 보지 않았는가. 내가 만든 작고 딴딴한 도시, 그 누구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네. 고려해보게나"

친구들의 의견을 듣고난 망라이와 그의 관리들은 모두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고,
마침내 망라이는 말한다.
"오케이! 자네들 의견이 맞네. 적들이 쳐들어오는 만일의 경우도 생각해야지.
결정! 가로 2000미터, 세로 1800미터로 만들어보겠네!"

그리하여 치앙마이의 크기가 정해지게 되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게 된다.

치앙마이 연대기에서는 람캄행(파야 루앙)이 치아아미의 7가지 상서로운 조건들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참고 치앙마이의 7가지 상서로운 조건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치앙마이가-새로운-도읍지로-적합한-7가지-상서로운-조건들?category=1002982

 

치앙마이가 새로운 도읍지로 적합한 7가지 상서로운 조건들

Zinme Yazawin 찐메 야자윈(ဇင်းမယ် ရာဇဝင်) 찐메는 치앙마이, 야자윈은 역사, 연대기를 말하는 단어로 18세기에 쓰여진 버마가 란나를 지배했을 당시를 기록한 버마 역사서이다. 그에

chaokaoli.tistory.com

 

방향이 결정되자 일처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모두 9만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5만명은 왕궁과 왕족들의 거처 등을 짓게 하고,
4만명은 성벽과 해자 그리고 동서남북의 4대문 쁘라뚜 타패(동), 쁘라뚜 쑤안독(서), 쁘라뚜 치앙마이(남), 쁘라뚜 후아 위앙(북) 공사 등을 담당하게 하는데 공사는 북동쪽에서 시작하여 4방향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때 망라이가 벼락에 맞아 죽게 되는 치앙마이 시장도 시작되었다.

해자가 지금 현재 치앙마이에서 볼 수 있는 해자 크기로 생각하면 안된다.
적의 수비와 함께 홍수 방지 기능도 담당했을 것이다.

 

 

출처:https://www.silpa-mag.com/history/article_27005



이때 4대문 중 가장 중요시한 곳은
왕족들의 거처가 있는 후아 위앙(지금의 창프악)으로 도시 계획상 인체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쁘라뚜 후아 위앙, 이후 왕 즉위식은 이 문을 통해 들어가며 거행되었다.
버마에게서 독립한 후 람빵의 까윌라가 폐허가 된 치앙마이로 들어갈 때도 이 문을 통해 들어가게 된다.

4대문 외에도 4곳의 구석을 중요시하였다.
특히 아래 사진의 쨍 씨품แจ่งศรีภูมิ을 중시하였다.
4대문과 4쨍은 따로 다룰 예정이다.

출처:https://www.chiangmainews.co.th/page/archives/560018/


이때 라와족에게 의견을 구하고 북쪽 문을 통해 개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게 된다.
아래는 이를 나타내는 그림이다.

출처:https://www.photodharma.net/


공사기간은 4개월로 공사가 마감된 날이자 치앙마이가 시작된 날은
1296년 4월 19일 목요일 새벽 04시였다.
물론 이는 점성술을 통해 잡은 상서로운 날이다.

도시는 치밀하게 의도된 계획과 상징성을 갖고 건설되었다.**

이렇게 하여 새로 건설된 도시 이름은
놉부리 씨 나콘핑 치앙마이 นพบุรีศรีนครพิงค์เชียงใหม่다.***

만족한 망라이는 두 친구와 공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간의 노고를 달래며
3박 3일간 음식과 술의 향연을 펼쳐준다.

그리고 두 왕은 각자의 왕국으로 돌아가는데,
이때 감사의 표시로 응암 므앙에게 감사의 표시로 여인을 아내로 선물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응암 므앙은 부인의 분노를 사게 되어 개인적인 불행이 시작된다.

치앙마이로 도읍지를 변경한 후
하리푼차이의 마지막 왕인 이바의 아들로 람빵에 있던 파야 벅이 드디어 복수전을 펼치려 공격을 감행하게 되고,
이에 망라이의 둘째 아들 쿤 크람이 새로운 영웅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면서
망라이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란나 2대 왕, 쿤 크람의 시대가 오는 계기가 된다.

치앙마이 건설 이야기는 그만하고
파야 벅으로 넘어가 보자.

* 람캄행의 쑤코타이 성벽은 동서로 1600미터, 남북으로 2000미터의 직사각형이다.

쑤코타이


치앙마이


** 치앙미아 도시 건설의 계획과 상징은 신체와 정신, 행성과 우주 등의 컨셉이 들어가 있으나 이와 관련해서는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수 있으므로 나중에 따로 간략하게 소개할 예정이고 여기서는 간략하게 치앙마이 건설 과정만 소개한다.

*** 짜마테위가 온 곳이 롭부리, 치앙마이는 놉부리 지역으로 위앙 놉부리เวียงนพบุรี라고 불렸다고 한다. 놉นพ이라는 말은 빨리어로 9 또는 새롭다는 의미가 되는데, 치앙마이의 마이가 바로 놉นพ과 같은 말이 되니, 놉부리가 곧 치앙마이가 된다. (부리บุรี-마을, 도시) 라와족 9가문의 도시라고도 한다. 또 이야기가 길어지니 중지! ㅋㅋㅋ

**** 치앙마이는 도시 건설 이야기만 해도 풀어갈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라와족, 라와족 도시부터 인타킨, 태국 점성술 등등. 하지만 역사전공자도 아니고 대~충 넘어가고 나중에 하나씩 생각날 때마다 추가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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