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개의 논이라는 란나ล้านนา,
란나, 란나하는데 누가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궁금했다.
란나라는 이름은, 국호(?)는 누가 언제부터 사용했는가?
망라이가 응언양 25대 왕으로 즉위하고 치앙라이나 치앙마이로 옮긴 후 "이제부터 우리 나라는 란나로 부를 것이다. 내가 란나 1대 왕이다!"라고 하지도 않았을테고 말이다.
그럼 란나라는 이름은 언제부터일까?
현재 태국 내에서 발견된 란나라는 이름은 155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비석에서 처음 발견된다.
1553년이면 매쿠 왕พญาแม่กุ때로 버마에 먹히기 겨우 5년 전이다.
그간 란나ล้านนา와 이 란나ลานนา를 같이 사용해왔으나
1980년 한스 펜스가 치앙라이주 치앙콩에서 발견된 왓치앙싸 비문ศิลาจารึกวัดเชียงสา에서 란창ล้านช้าง과 란나ล้านนา 두 글자를 찾아내며 란나ล้านนา라는 단어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
란ล้าน은 백만, 란ลาน은 평지, 마당, 공간의 뜻을 갖고 있다.
비문 관련하여서는 아래 사이트를 참고하면 된다.
비문 내용도 PDF파일로 태국어로 보기 쉽게 나와있다.
https://db.sac.or.th/inscriptions/inscribe/image_detail/21114
하지만 1553년 비문에 나와있다는 말이지 그때부터 란나를 사용했다는 말은 아니다.
중국 기록으로는 명나라 2대 건무제가 란나 7대 쌘므앙마(1385-1401)에게 조공을 요구하며 보낸 서신에서 란나의 왕을 짜오 란나เจ้าล้านนา 또는 타오 란나ท้าวล้านนา, 중국의 황제를 짜오 룸파เจ้าลุ่มฟ้า라고 불렀다고 한다.
짜오 룸파는 쌈팡깬이 중국과 치앙쌘에서 싸울 때 잠깐 등장했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쌈팡깬-이번엔-중국과-싸우다?category=1022438
중국어로 표기된 란나는 란나 소리나는 대로 兰纳, 蘭納 ,兰那이며,
원나라 때는 란나를 팔백 명의 부인(빠빠이씨푸八百媳妇), 팔백 개의 지역(빠빠이따띠엔八百大甸)으로 불렀다.
한편으로는 란나가 지배하는 지역이 팔백 개이며 각각의 지도자는 여성이기에 빠빠이씨푸라 불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으나 각각의 지도자가 여성이라기 보다는 란나 왕에게 딸을 주며 말하자면 혼인정책을 통해 복속하거나 유대를 강화한 지역이 많아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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