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푼차이(하리푼자야 빨리어)
망라이가 람푼의 하리푼차이를 정복한 해는
치앙마이 연대기는 1283/84
치앙마이 대학교 싸라싸와디 옹싸꾼 교수 등에 따르면 1292년이다.
개인적으로는 1292년을 기준으로 보고 있다.
몽고를 대비한 란나, 파야오 그리고 쑤코타이 3왕의 동맹은
(1276년 또는 1287년)
란나 망라이에게는 하리푼차이를 치기 전 후방을 든든히 하기 위한 동맹도 겸하였을 것이다.
"내가 하리푼차이를 먹는 동안 하리푼차이를 도와주거나 내 도시들을 건드리지마!"
아무튼 연도의 차이는 있어도
순서는 응언양 - 치앙라이- 팡 그리고 3왕 동맹 - 하리푼차이 점령 - 위앙 꿈깜 - 치앙마이 건설로 이어지게 된다.
하리푼차이!
롭부리의 짜마테위로부터 시작된 하리푼차이는 치앙마이 연대기에 따르면 659년,
그리고 치나깐말리빠껀 ชินกาลมาลีปกรณ์ Jinakalamali이나 짜마테위 전설ตำนานจามเทวีวงศ์에 따르면, *
도이 수텝의 은둔자 수텝(와수데바Vasudeva, 와수텝)이 629년에 도시를 건설한 후
롭부리의 라워(lavo) 왕국에 지도자를 요청, 짜마테위가 갔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 연대가 너무 이르다고 767-768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언제면 어떠리,
중요한 것은 하리푼차이와 라워 왕국의 관계일 것이다.
그런데 왜 망라이는 하리푼차이를 공격하였을까?
팡을 찾은 상인들의 말에 따르면 하리푼차이는 부유했다는데
왜 하리푼차이는 당시 부를 누리고 있었을까?
망라이가 활약한 13세기 후반은 말레이인니 쪽의 스리위자야 왕국의 세력이 약화되던 시기였다.
스리위자야 왕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존재하며 롭부리를 중심으로 하는 몬족의 트와라와디ทวารวดี까지도 영역을 넓혔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스리위자야의 왕자와 짜마테위가 결혼하지 않았을까하는 견해도 있다.
짜마테위 역시 눈부시게 아름다워 역시 그녀를 두고 전투가 벌어졌다는 전설도 있다.)
크메르도 13세기 후반 무렵, 몽고의 위협 또 씨암과의 전쟁을 통해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치앙마이-람푼의 삥강이 중부의 짜오프라야 강과 만나 아유타야까지 흐르며 해상으로 연결되는 무역로가 되어, 중국과 북부 그리고 해상으로 이어지는 그 중심에서 하리푼차이가 번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국 북부를 연결하는 일종의 교통로, 교통 중심지 역할을 하는 위치였던 것이다.
"그래? 그럼 공격해야지.
우리가 이기겠지? 그지?
전투 준비하라!"
"좀 참으시지요.
지금 당장의 군사력으로는 쉽게 점령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간을 두고 전략을 마련해야 합니다."
망라이는 주위의 만류에 한 발 물러서며 묻는다.
"그래?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좋은 방책이 있느냐?"
이때 아이 파อ้ายฟ้า(쿤 파ขุนฟ้า)가 등장하게 된다.
"잠시 주위를 물리시지요.
둘이서만 조용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차후 짜마테위 전설을 통해
하리푼차이 설립과 역사도 따로 간추려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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