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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나 역사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ล้านนา/란나 전성기

중국 허ห้อ 여인을 더 사랑한 10대 엿 치앙라이, 추방되다.

by ChaoKaoli 202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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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7년,

1441년 아버지 쌈팡깬을 유배보내고 왕위를 차지한 후 46년간 동서남북 전쟁터를 누비며 란나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띨로까랏은 1447년 세상을 떠난다.

그럼 다음 왕위는?

10대 왕이 되어야 할 띨로까랏의 아들 타오 분르앙은 이미 1465년 반란혐의로 처형된 상황이었다.

 

처형되기 전 타오 분르앙은 치앙라이를 다스리며,

아버지 띨로까랏을 따라 전쟁터를 누비며 활약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에게 아들이 있었으니 타오 엿 치앙라이이다. 

엿 므앙ยอดเมือง이라고도 불리는 엿 치앙라이ยอดเชียงราย는 므앙 너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므앙 너이가 아닌 치앙라이의 산꼭대기에서 태어났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망라이의 도시, 치앙라이에서 태어난 엿 치앙라이, 

그가 바로 란나의 10대 왕, 파야 엿 치앙라이พญายอดเชียงราย이다.

이때 나이가 32이었다. 

아마도,

엿 치앙라이가 란나 10대 왕이 되는 과정도 순탄치많은 않았을 것이다.

46년이라는 장기간의 권력을 유지한 띨로까랏의 뒤를 잇는 왕으로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왕위가 가는 과정에서 귀족들간의 보이지 않는 세력 다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할아버지 손에 아버지 타오 분르앙이 죽는 모습까지 보았으니

그 또한 정상적이지 않고 비뚤어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비뚤어질테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왕비 낭 뽕너이นางโป่งน้อย가 있었고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짜오 라따나เจ้ารัตน를 낳게 되는데 이 라따나가 란나 11대 왕이 되는 파야 (므앙)깨오พญาแก้ว이다. 

 

비뚤어져있었을지도 모를 엿 치앙라이, 

그는 낭 뽕너이보다는 허ห้อ(운남 중국인)족 여인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들을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아끼고 총애하여 프라오를 다스리게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왕비 낭 뽕너이도 만만한 인물을 아니었다.

그녀와 관련한 이야기도 많으나 이건 뒤로 미루고, 

암튼 그녀 역시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엿 치앙라이와의 결혼은 그저 정략적인 결혼이었다고도 한다.

 

허ห้อ 부인에 대한 사랑은 허ห้อ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란나 왕족의 전통과 풍습, 규율 등을 무시한다고 판단한 귀족들은 불만족을 표시하며 그를 몰아내게 된다.

 

결국 띨로까랏의 뒤를 이어 란나 10대 왕이 된 엿 치앙라이는 8년 만에 귀족들에 의해 므앙 싸맛(므앙 너이 부근)으로 쫓겨나게 되고뒤를 이어 14살의 짜오 라따나가 란나 11대 왕이 된다. 그가 바로 파야 깨오พญาแก้ว이다.

엿 치앙라이는 10년 후 므앙 싸맛에서 생을 마감한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란나의-유배지들과-므앙-너이เมืองน้อย-그리고-죽음

 

란나의 유배지들과 빠이 옆 동네 므앙 너이เมืองน้อย

망라이 큰 아들 쿤 크르앙은 아버지 망라이에게 대들었다(?) 므앙잉(위치 불명)에서 살해당하고 셋째 쿤 크루아는 문제를 많이 일으켜 치앙 뚱(켕퉁)으로 유배당하게 된다. https://chaokaoli.tistory.com

chaokaoli.tistory.com

 

14살에 왕이 되었으니

그 어머니 낭 뽕너이가 섭정을 했을 것이라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낭 뽕너이와 귀족들, 낭 뽕너이 역시 유력집안 출신으로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가 허족 여인을 더 사랑하는 엿 치앙라이의 추방과 관련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파야 깨오의 어머니 낭 뽕너이는 아노차테위อโนชาเทวี 또는 씨리요싸와디สิริยศวดี라고도 불리며

그녀와 관련한 비문이 엿 치앙라이 시대 세워진 치앙마이 반캉왓 근처에 있는 왓 람뻥วัดร่ำเปิง에 남아있다.

 

출처:https://www.watrampoe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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