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망라이가 1292년 하리푼차이를 점령할 때
스파이로 쿤 파를 심어 내부 혼란을 야기하는 전략을 사용하여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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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한 사건이 5세기 우리 역사에도 등장하는데
바로 고구려가 승려 도림을 백제로 파견, 바둑을 좋아하던 백제 개로왕의 환심을 산 후 하리푼차이의 파야 이바와 같은 정책을 펼치게 하여 장수왕의 백제 한성 점령을 수월하게 한 적이 있다.
5세기 고구려, 13세기 란나 이제 15세기 아유타야이다.
찰리앙(씨 싸차날라이), 썽쾌 등에서 띨로까랏의 기세에 눌린 아유타야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반격을 고심하게 된다.
이때 흑마술에 뛰어난 버마 바간의 수도승을 초대하여 "치앙마이 너무 강함. 어떻게 무너뜨릴 방법이 없을까요?"라고 물어본다.
그 수도승의 이름은 망 룽 루앙มังหลุงหลว้าง 또는 มังหลุงหลวง으로 그는 "치앙마이 도시 배치가 어떤가요? 가본 적이 없어서... 뭐 특별한 것이 있나요?" *
치앙마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뜨라이록은 한프롬싸탄หาญพรหมสะท้าน을 불러 사정을 이야기하게 한다. 한프롬싸탄은 누구?
바로 치앙마이로 파견되었던 스파이로, 얻어터진 후 머리를 대머리로 밀린 후 창프악 시장에서 띨로까랏의 군대 이동을 보고 잘못된 정보를 아유타야에 전하기도 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치앙마이를 둘러본 후 북동쪽 쨍씨품แจ่งศรีภูมิ부근에 있는 커다란 반얀나무(신성한 나무ไม้สรีเมือง,ไม้มิ่งเมือง)가 치앙마이를 지키는 신성한 나무로 보았던 적이 있다.
지금의 왓 차이씨품이 있는 부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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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려 "그렇다면 제가 가서 그 나무를 없애고 치앙마이란 도시의 힘을 뺏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금은보석을 넉넉하게 받은 그는 고향 바간으로 돌아간 후 이어 바고(페구)를 거쳐 치앙마이로 들어선다.
치앙마이에서 그는 하이야 지역의 왓 난타람วัดนันทาราม에 머물며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다.
왓 난따람วัดนันตาราม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타ทา가 북부에서는 따ตา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파가 아닌 사파의 무공, 아니... 흑마법 등에 조예가 깊은 망 룽 루앙이지만 그는 불법에도 정통한 인물이었기에 어떠한 질문에도 거침없는 답변을 하는 그에 대한 소문은 띨로까랏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먹이를 물어 버렸어'
망 룽 루앙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띨로까랏은 신하들을 시켜 치앙마이를 더 풍요롭고 영화롭게 하는 방법을 묻게 되고,
망 룽 루앙은 "이건 좀 그런데... 실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하고 운을 뗀다.
"제가 치앙마이를 둘러보니 상서로운 지역에 신비로운 기운이 넘치는 곳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북동쪽의 기운이 이상합니다. 북동쪽이 이 도시의 가장 상서로운 지역인데 기운이 복잡하게 얽혀 잘 통하지가 않습니다. 이 기운을 풀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북동쪽의 기운을 풀어주게 되면 그곳의 밝고 신비로운 기운이 온 도시를 덮어 적으로부터도 보호해줄 것이며 도시를 더욱 풍요롭게 해줄 것입니다. 그럴러면 그 지역을 정리한 후 그곳에 왕궁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리고는 본색을 드러낸다.
"혹시 그 지역에 큰 나무들이 있나요? 만약 큰 나무들이 있다면 뽑아내고 그 뿌리까지 모두 제거하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북동쪽의 성벽을 헐어 기운이 통하게 하면서 그 지역을 평평하게 다지신 후 왕궁을 세우시고 그곳에서 지내시면 치앙마이는 더욱 안전하고 풍요로운 도시가 될 것입니다."
신하들은 그 말을 띨로까랏에게 전하고,
망 룽 루앙을 신뢰하던 띨로까랏은 그의 말대로 시행하게 한다.
1296년 치앙마이 건설과 함께 망라이가 건설한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던 순간이다. 성벽의 일부를 헐고 치앙마이 시민들이 모여 그 그늘에서 쉬며 어울리게 했던 커다란 반얀나무는 그 뿌리까지 제거되었고 다른 나무들도 모두 그 뿌리까지 제거된 후 왕궁이 들어서게 된다.
이어 바간 승려는 이 곳의 이름을 씨품ศรีภูมิ이라 부르고, 성벽을 허문 곳에 쁘라뚜 씨품(씨품 게이트)와, 씨품 다리를 만들게 했다. 이 쁘라뚜 씨품은 11대 깨오แก้ว왕 때 제거된다.
띨로까랏의 재위기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그러한 전쟁 와중에도 씨품지역의 대규모 공사를 해야했으니, 어찌 불만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부에 작은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일은 1465년에서 1466년 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아유타야, 바간 승려만 보냈을까?
아니다 그가 실패할 것을 대비하여 또 다른 준비를 해두었다.
* 버마의 승려 이름 망 룽 루앙มังหลุงหลว้าง 또는 มังหลุงหลวง을 보고,
망라이가 생각이 났다.
망라이란 이름 대신 멩라이란 이름을 근대 들어 사용하는 이유 중 하나로이 망มัง이 바로 버마에서 사용되는 접두사이기 때문이라는데 망에 '위대한'이란 의미가 버마나 라와 등에 말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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