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라이 형님의 치앙마이 건설 이야기를 몇 번 다루었고
또 앞으로도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계속 다루겠지만
그 치앙마이의 마지막, 란나의 마지막은 결국 왕궁이 사라지는 것, 왕궁의 상징성이 사라지는 시점이 되었을 것이다.
치앙마이는 위앙 치앙마이 그리고 위앙 치앙마이 안쪽에 왕궁이 있는 위앙 깨오เวียงแก้ว
의 이중으로 만들어졌다.
위앙 깨오는 아누싸와리 오와빼โอวาแป๊ะ의 뒤쪽 대각선 방향에 있다.
버마 독립 후의 까윌라가 치앙마이를 복구하고 다시 입성할 때,
그는 망라이가 했던 대로 후아위앙(창프악)을 통해 성내로 들어가 치앙만에 잠시 머물다 이어 위앙깨오로 들어갔다.
이 위앙깨오가 망라이 때부터 사용되던 왕궁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 위치와 상징성 또 건물 일부 벽에서 발견된 위앙 깨오라는 단어를 통해 왕궁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전 1909년 창경궁이 왕족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에서 동물원을 만들며 누구나 쉽게 발을 들일 수 있는 창경원으로 바뀌었듯이, 위앙깨오의 일부에 역시 란나의 몰락과 함께 작은 동물원과 교도소가 들어서며 그 상징성이 사라지게 된다.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910년대 중반으로 보고 있다.
이는 결국 씨암(싸얌)의 의도가 담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굳이 성내에 그것도 위앙 깨오에 교도소를 둘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패자의 역사가 맞보아야 하는 슬픔이랄까.
중앙 교도소에서 여성 교도소로 바뀌어 유지되다가 2013년인가 매림으로 이전되고 2016년 공식적으로 철거가 진행되어 역사 공원으로의 변모를 꾀하고 있으나 지지부진한 상황으로 보인다.
https://www.reviewchiangmai.com/prison-in-town/
개인적으로는 이 자리가 제대로 복원되고 위앙 깨오의 상징성이 조금이라도 회복될 때,
치앙마이는 지금 보다 더 안정적으로 발전되는 도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위앙 깨오와 관련해서는
란나의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해당 부분에서 다시 자세하게 다루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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