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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나 역사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ล้านนา95

위기에 빛난 찌라쁘라파 여왕의 활약(1545-1546) 앞에서 쌘 크라오는 왕위를 이을 마땅한 후계좌가 없기에 치앙 뚱과 므앙 나이의 영주(군주, 왕)들에게 치앙마이로 와 왕이 되라고 한다. 이때 치앙 뚱에서는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므앙 나이에서는 오케이하고 치앙마이로 이동하게 된다. * 이때 귀족들이 왕도 죽이는 마당에 자기들이 왕을 칭하거나 아무나 내세울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말 안들었을 경우 유배로 보내기도 하는 지역의 영주들을 왕으로 불러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왕족이 아니라면 왕이 될 생각을 갖지 말고, 귀족이 아니라면 관료가 될 생각을 하지 마라." 라고 망라이가 말했던 란나를 지배하는 신분원칙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망라이-왕후장상의-씨가-따로-있다 마.. 2022. 9. 26.
귀족 권력 투쟁과 란나 15대 찌라쁘라파 여왕 즉위 쌘 크라오แสนคราว 무리는 13대 타오 차이와 그의 아버지 14대 껫쳇타랏마저 죽이며 득세를 한다. 누가 이들 무리에 맞설 수 있었을까? 껫쳇타랏에게는 부인 찌라쁘라파มหาเทวีจิรประภา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었다. 쌘크라오에게 암살당한 13대 란나 왕이었던 타오 차이와 둘째 쫌므앙เจ้าจอมเมือง 그리고 셋째 딸 엿캄팁ยอดคำทิพย์이다. 둘째 쫌므앙은 몸이 약해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지적장애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셋째 딸 엿캄팁은 란창ล้านช้าง(란쌍ລ້ານຊ້າງ)의 포티싼랏โพธิสาลราช(라오스어 ໂພທິສະລາດ포티싸랏) 과 결혼하여 차이쳇타티랏พระไชยเชษฐาธิราช(라오스어 ເສດຖາທິຣາດ쎗타티랏)을 낳은 바로 란창의 어머니이다.. 2022. 9. 22.
란나 12, 13, 14대 왕들의 암살과 혼란기 파야 깨오가 죽기 이틀 전 이미 왕으로 내정되었던 파야 껫쳇타랏พญาเกสเชษฐราช(프라므앙껫끌라오พระเมืองเกษเกล้า)은 란나 망라이 왕조의 열 두번째 왕이 된다. 1526년, 므앙 너이에 살던 그는 귀족들에 의해 추대되었기에 그는 실권을 갖지 못한 왕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1528년 왓 록몰리에 쩨디와 위한을 세움 1530년 11대 깨오 왕이 세운 궁전이 불에 탐 1532년 타패 인근에 화재 발생, 지역주민들 구호 1532년 불탄 궁전을 복원 궁전이 불에 타고, 타패 인근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 불로 인한 피해가 그의 재위기간에 있었고 1533년 11월에는 아주 밝은 별똥별이 사방에서 하늘을 뒤덮었다. 조짐이라고 해야할까? 1535년 9월에서 10월 사이 이번에는 역모 사건이 발.. 2022. 9. 17.
란나 11대 파야 깨오 - 상한 말고기를 먹고 죽다. 독살? 므앙 싸맛으로 유배된 엿 치앙라이의 뒤를 이어 1495년 14세에 왕위에 오른 파야 깨오พญาแก้ว, 그는 2년 후인 1497년 왓 부파람วัดบุพพาราม을 세우는데 그때 상서로운 지진이 발생했다고 한다. https://youtu.be/J96cBNJg3os 상서로운 지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 지진은 1년 후인 1498년 있었다고 하는데, 1497년 공사를 시작하여 1498년 완공하면서 완공식을 할 때 발생한건가? 상서로운 지진이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보아 지진 피해는 거의 없는 정도의 미진으로 참석자들이 모두 약간의 떨림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어 그는 쑤코타이, 아유타야와도 계속 전투를 이어갔다. 아유타야의 프래, 난 공격과 란나의 쑤코타이, 찰리앙, 깜팽펫 공격 등 서로 열.. 2022. 9. 14.
중국 허ห้อ 여인을 더 사랑한 10대 엿 치앙라이, 추방되다. 1487년, 1441년 아버지 쌈팡깬을 유배보내고 왕위를 차지한 후 46년간 동서남북 전쟁터를 누비며 란나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띨로까랏은 1447년 세상을 떠난다. 그럼 다음 왕위는? 10대 왕이 되어야 할 띨로까랏의 아들 타오 분르앙은 이미 1465년 반란혐의로 처형된 상황이었다. 처형되기 전 타오 분르앙은 치앙라이를 다스리며, 아버지 띨로까랏을 따라 전쟁터를 누비며 활약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에게 아들이 있었으니 타오 엿 치앙라이이다. 엿 므앙ยอดเมือง이라고도 불리는 엿 치앙라이ยอดเชียงราย는 므앙 너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므앙 너이가 아닌 치앙라이의 산꼭대기에서 태어났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망라이의 도시, 치앙라이에서 태어난 엿 치앙라이, 그가 바로 란나의 10대 왕,.. 2022. 9. 8.
란나와 아유타야, 연도별 사건 정리 란나와 아유타야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치앙마이연대기, 유안파이 등을 참고하여 연대순으로 정리해보았다. 때로 연도가 1년씩 차이가 날 수 있는데 이는 사건 특히 전쟁과 같은 경우는 우기를 피해 벌어지는 사건의 연속성때문이다. 1409년 띨로까랏 출생 1431년 보롬마뜨라이록 출생 1442년 띨로까랏, 아버지 쌈팡깬 쫓아내고 왕위 등극 1442년 아유타야 보롬마라차티랏 2세 치앙마이 공격, 실패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1442년-띨로까랏-아유타야와-첫-전투를-시작하다?category=1022438 띨로까랏, 아유타야와 첫 전투를 시작하다. 아유타야 보롬마라차티랏 2세에게 치앙마이를 공격해달라고 비밀리에 편지를 보낸 므앙 텅의 군주, 믄 쌈 크라이한은 무사했을까?.. 2022. 9. 6.
치앙 룽에서 "미친 코끼리" 전술을 사용한 라와를 물리치다 띨로까랏 관련 이야기는 하면 할 수록 연관되는 이야기가 많아 너무 길어질 듯 하여 이제 간략하게 마무리할 생각이다. 1480년, 베트남이 루앙 프라방(란쌍)을 공격한 후 이어 난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후 전성기를 맞게 되는 란쌍 이야기도 풀어야 하는데...) 난의 타오 카깐은 4만의 군대로 베트남과 싸워 이긴 후 베트남 군사들의 목을 베어 포로들과 함께 치앙마이의 띨로까랏에게 바쳤다. 하지만 쉽게 물러나지 않는 베트남을 상대로 띨로까랏은 군대를 파견하여 해결한 후 전적을 세운 타오 카깐에게 치앙라이를 맡긴다. 란나에서 난보다는 치앙라이가 보다 더 중요한 도시임을 알 수 있다. 띨로까랏은 베트남의 포로들과 함께 선물을 명나라 황제에게 보냈는데, 란나가 베트남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믿지 못한 명나라 황제는.. 2022. 9. 3.
1900년, 란나 말기 노비의 가격은? 왕족, 귀족, 평민ไพร่, 노비ทาส의 신분제는 계속 유지되어 왔는데 1900년 표시된 노비의 가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지역 남자 여자 난 62밧 62밧 치앙마이 54밧 72밧 람푼 54밧 72밧 프래 48밧 48밧 람빵 45밧 60밧 턴เถิน 42밧 64밧 번화한 도시, 번잡스러운 도시,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도시의 노비 가격이 비싸며, 남자보다는 여자 노비의 가격이 더 비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비는 소유자의 재산으로 여겨져 상속이 된다. 따라서 여노비에게서 태어난 아이 역시 그대로 소유자의 재산이 되기에 더 비싸다. 세종 때 실시된 노비종모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럼 평민과 여노비 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노비가 되는 것일텐데.. 여기서 여노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노비도 부.. 2022. 9. 3.
망라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 란나에의 신분계급 유지는 출생신분을 인정하게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왕족, 귀족, 승려, 평민, 노예로 이루어진 란나의 신분, 1198년 고려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있더냐?!" 라고 외쳤던 만적, 100여년이 지나 란나에서 망라이가 답을 던진다. 망라이는 말한다. "왕족이 아니라면 왕이 될 생각을 갖지 말고, 귀족이 아니라면 관료가 될 생각을 하지 마라. 버차이 츠아짜오 꺼 야 왕뻰프라야, 버차이 츠아쎄나 꺼 야 왕뻰암맛 (버짜이 쯔아짜오 꺼 짜빠이 왕뻰쁘라야, 버짜이 쯔아쎄나 꺼 짜빠이 왕뻰암맛 ㅋㅋㅋ) บ่ใช่เชื้อเจ้าก็อย่าหวังเป็นพระยา บ่ใช่เชื้อเสนาก็อย่าหวังเป็นอำมาตย์" * 즉, "응,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어."라고... 그래서! 띨로까..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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