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야 캄푸가 치앙캄에서 악어에 물려 죽고,
이 소식은 치앙마이에 있던 아들 파유에게 전해지게 되고,
파야 파유พญาผายู는 아들 타오 끄나에게 치앙마이를 잠시 맡기고 치앙쌘으로 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된다.
하지만 파유는 치앙쌘에 머물지 않고,
다시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통치를 하게 된다.
망라이에서 시작된 치앙마이가 5대 파유에 와서 다시 란나 왕의 중심지로 역할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치앙마이(망라이) - 치앙라이(파야 차이쏭크람) - 치앙쌘(쌘푸) - 치앙쌘(캄푸) - 치앙마이(파유)
파유는 아버지의 유골을 가지고 치앙마이로 돌아와,
쁘라뚜 수완독 부근 성 안쪽에 쩨디를 짓고 유골을 보관한다.
그리고 그곳에 사원을 짓게 되는데 이름하여 왓 리치앙프라วัดลีเชียงพระ로 이후 왓 프라씽วัดพระสิงห์วรมหาวิหาร으로 불리는 바로 그 사원이다.
그는 하리푼차이에서 승려들을 초대해 이 사원에 머물게 하며 불교 보급에도 힘을 썼다.
버마 침략 이후 역시 이 사원도 잊혀지다가 1926년 란나 지역의 사원 재건에 일생을 바친 크루바 씨위차이ครูบาศรีวิชัย에 의해 재건되는 과정에서 파야 캄푸의 유해와 귀중품이 담긴 항아리가 발견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귀중한 유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이를 통해 쩨디에 유골이나 유물을 어떻게 안치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시험에 꼭 나오는게 매장방식인데...'
파유는 치앙 콩의 군주 응와틍งั่วเถิง의 딸 찌뜨라테위จิตราเทวี와 결혼하였는데 이는 치앙콩을 통해 북쪽의 수비를 강화하는 측면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 아들이 바로 란나의 황금기를 알리게 되는 파야 끄나이고,
둘째는 타오 마하 프롬이다.
망라이 이후의 초기 혼란기는
파유가 치앙마이를 다시 근거지로 하며 안정을 찾아간다.
망라이가 구상했던 치앙마이의 위치적 강점을 치앙마이를 아들에게만 맡기고 떠났던 4대 캄푸까지는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5대 파유가 다시 치앙마이를 수도로 한 이후 란나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파유는 19년간 평화를 유지하고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하고,
큰 아들 파야 끄나가 새로이 란나의 6대 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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