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5년 끄나กือนา는 30년 간의 란나 통치 후 죽음을 맞이하고,
이어 란나 7대 왕으로 파야 쌘므앙마พญาแสนเมืองมา가 23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치나깐말리빠꼰ชินกาลมาลีปกรณ์에서는 23세, 치앙마이 연대기는 14세)
아무튼 연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 란나 역사학자들의 의견을 따라 1385년으로 가보자!
이름 쌘므앙마แสนเมืองมา는 선친 끄나 왕 당시 란나의 힘을 보여주는 것인데,
아들이 태어나자 십만개의 므앙에서 축하해주러 왔다는 의미에서 쌘(십만) 므앙(도시) 마(오다)로 지었던 것이다.
끄나 왕이 죽자 마자 이 소식을 들은 끄나 왕의 동생 마하 프롬มหาพรหม은 조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 흐름은 마치 1319년 2대 차이쏭크람이 아들 쌘푸에게 치앙마이를 맡기자 저 멀리 몽 나이에서 타이 야이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 차이쏭크람의 동생이자 쌘푸의 삼촌, 쿤 크루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조카에게 왕위를 넘길 수 없다! 이거지!
마하 프롬은 치앙라이에서 군대를 이끌고 치앙마이로 오게 되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형의 장례식에 참석하겠다였다. 똑같네 쿤 크루아가 된 핑계와...
마하 프롬은 군대를 배치시킨 후 쌘 파넝แสนผานอง(최고위 관리, 쌘이 여기서는 십만명을 관리하는 직책)에게 "형이 죽었는데 내 가만있을 수 없어 왔다. 형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서 조카에게 전해주게나"라고 전한다.
이 말을 들은 쌘파넝은 곧바로 마하 프롬의 의도를 눈치챈다. 하지만 바로 앞인지라 "내가 먼저 가서 말을 전하고 당신을 맞을 준비를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를 안심시킨다.
그는 급히 쌘므앙마에게 알리는 한편 만 명의 군사를 소집하여 마하 프롬의 공격에 대비하면서 전군 전투태세를 준비하게 한다. 이를 안 마하 프롬은 "젠장, 저 놈이 우리 편이 아니었군." 하며 위앙 꿈깜을 먼저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 위앙 꿈깜의 남자들은 치앙마이 수비대로 자원한 상태라 마하 프롬에 사로잡힌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 뿐이었다.
믄 록나콘은 이들을 포함한 8만명의 군사로 치앙마이를 지키고, 쌘 파넝은 위앙 꿈깜 남자들을 포함, 7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야밤을 틈타 마하 프롬을 공격하게 된다.
위앙 꿈깜 남자들,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동네 남자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위앙 꿈깜 여자들은 가만히 앉아 기다리지 않고 마하 프롬 군인들의 칼을 빼앗아 숨기고 싸우는 등 용감한 모습을 선보이게 된다.세가 불리함을 느낀 마하 프롬은 바로 튀는데, 튄 장소는 람빵을 거쳐 남쪽 아유타야였다.아유타야의 당시 왕은 보롬마차티랏 1세สมเด็จพระบรมราชาธิราชที่๑였다.하리푼차이 파야 이바가 2차 복수전에서 실패한 후 도망간 루트와 비슷했으리라.
나중에 마하 프롬은 아유타야 군대와 함께 다시 치앙마이를 공격하나,모두 실패로 끝나고 다시 아유타야로 패퇴를 경험하게 된다.하지만 여기서 마하 프롬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다.아유타야로 돌아간 마하 프롬, 그는 여기서 그의 보호자이기도 한 왕의 부인과 바람을 피게 되고,아유타야에서도 쫓겨나게 되는데...이때!!! 바로 이때!!! 짜잔하고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씨힝 불상(프라푸트씨힝พระพุทธสิหิงค์)인데 왓 프라씽의 바로 그 씽이다. 씽은 씨힝을 줄인 말이다. 아유타야로 쫓겨나는 마하 프롬을 바라보는 연인의 심정이었을까? 그 부인은 씨힝 불상을 몰래 훔쳐와 연인 마하 프롬에게 주었던 것이다. (치앙마이 연대기에 나온 내용이고, 다른 땀난에 따르면 조카 쌘므앙마에게 화해의 뜻으로 주기 위해 깜팽펫에서 마하프롬이 훔쳐온 것이라고 한다. 차후 다룰 예정)
그렇게 훔쳐 주거나 훔쳤을 정도면 그 부처상은 작았겠네. 그렇다. 79센치정도이니 가능했을 것이다.
치앙마이로 슬쩍 돌아온 마하 프롬, 하지만 삼촌을 믿지 못하는 쌘므앙마는 삼촌을 죽이거나 유배보내지는 않고 원래의 자리인 치앙라이로 보낸다.
치앙라이로 바로 보내진 마하 프롬, 그렇다면 이 불상도 그 당시 치앙마이나 치앙라이에 있어야 위의 이야기가 얼추라도 맞을 것이다.
나중에 왓 프라씽을 다룰 때 이 부처상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이야기하겠지만 스리랑카에서 만들어진 이 불상은 쑤코타이, 핏싸눌록, 아유타야 등등을 거치다가 1388년에는 치앙라이 그리고 치앙마이 등으로 옮겨진다.
1388년, 그렇다면 마하 프롬이 아유타야에서 선물(?)로 받아온 후 치앙라이로 다시 보내지는 시기에 얼추 맞게 된다.
비록 조카를 상대로 반란은 일으켰지만 씨힝 불을 가져온 큰 일을(?) 해낸 마하 프롬이었던 것이다.
깜팽펫에서 치앙마이로 바로 들어와 안치되었는지,
쌘므앙마가 삼촌을 치앙라이로 다시 보냈으니 그때 갔다가 다시 치앙마이로 왔는지
또는 중간에 치앙라이, 아유타야 그리고 치앙마이 루트인지는 조금씩 다르다.
1388년 또는 1407년에 왓 프라씽에 안치되었다고 하는데,
1391년 씨힝 불상이 치앙마이 삥강에 도착하면서 신비의 광선을 보여주어 왓 파함이 세워졌다고 왓 파함에 소개되어 있는 만큼 1391년 쌘므앙마 시기 왓 리치앙프라(왓 프라씽)에 안치된 것이 맞는 것이 아닌가 싶다.
1391년은 쌘므앙마, 1407년은 쌈팡깬의 시대이다.
이동 루트에 관해서는 15세기에 나온 씨힝 불상 연대기와 짜마테위 이야기도 나왔던 치나깐말리빠꼰ชินกาลมาลีปกรณ์을 비교 정리한 후 천천히~ 정리하여 소개해 볼 생각이다.
아무튼 이렇게 마하 프롬의 반란은 마무리된다.
여기서 잊고 있던 일이 있다.
처음 마하 프롬이 아유타야로 도망친 후, 쌘므앙마는 아버지 끄나 왕의 장례식을 준비하게 된다.
그때까지 끄나 왕의 시신은 화장 절차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제 사태가 일단락되고 화장을 하고 장례절차를 진행하려 하였으나 치앙마이 성내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왜? 시신은 끄나 왕이 죽었던 부근의 후아 위앙(창프악)게이트 뿐만 아니고 다른 성문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문의 중요성, 상징성으로 인해 보호받고 있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시신을 화장한 후 금항아리에 담고는 해자를 통과하는 다리를 놓고 성벽 한쪽을 뚫어서 금항아리를 성내로 들여와 장례절차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란나의 전성기를 알리며 불교 중흥에 힘을 쓴 끄나치고는 마무리가 좀 좋지 못하다.
여기서 또 역사의 전개가 재미있는 것은,
쌘므앙마의 아들 쌈팡깬 시대에 귀신문ประตูผี이라 할 수 있는 쁘라뚜 쌘뿡ประตูแสนปุง이 치앙마이 남서쪽 방향에 만들어지는데 이 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사원이 바로 왓 프라씽으로 마하 프롬이 치앙라이로 가져갔던 씨힝 불상을 다시 치앙마이로 가져와 이 사원에 두면서 바로 이 귀신문의 악령을 막아내는 역할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역시 치앙마이 역사에 큰 일을 해낸 마하 프롬이다. ㅋㅋㅋ
왜 항아리에 담았나? 쩨디 안에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유물, 귀중품 등과 함께 안치하는 매장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파야 캄푸의 매장 항아리 관련은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란나-5대왕-끄나의-아버지-파야-파유พญาผายู
이렇게 쌘므앙마는 삼촌의 반란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7대 란나 왕에 오른다.
끄나 왕 이야기는 왓 쩨디루앙วัดเจดีย์หลวง을 다룰 때 또 한 번 등장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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