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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나 역사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ล้านนา/란나 초기 혼란기

쌘푸의 쌘은 치앙쌘의 쌘, 치앙쌘 건설 1329년

by ChaoKaoli 2022.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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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태어나 이름이 쌘푸인 란나 3대 왕 쌘푸แสนภู는 1325년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쌘푸는 치앙마이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후 치앙쌘이라 이름짓고 수도를 이전한다.

이때까지 아직 치앙마이는 상징성만 갖고 있었을 뿐 제대로 수도 역할을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망라이의 죽음 이후 불안감이 있었던가

 

치앙라이에서 북동쪽으로 60여키로 정도 떨어져있는 치앙쌘은

매콩을 자연해자 동쪽에 두고 가로 3키로, 세로 1.4키로로 모두 11개의 성문을 둔 이 도시는 1329년 3월 3일 금요일 완공되었다. 

 

건설 당시 모두 11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1. 쁘라뚜 양텅 ประตูยางเทิง 
2. 쁘라뚜 넝뭇 ประตูหนองมูต

3. 쁘라뚜 치앙쌘 ประตูเชียงแสน(또는 쁘라뚜 파싹 ประตูป่าสัก) - 도시로 진입하는 주요 성문

4. 쁘라뚜 탑만 ประตูทัพม่าน

5. 쁘라뚜 딘커 ประตูดินขอ

 

동쪽 매콩 방면에 있던 아래 6개의 성문은 매콩 범람에 의해 침수되었다고 한다.

6. 쁘라뚜 타어이 ประตูท่าอ้อย

7. 쁘라뚜타사오딘 ประตูท่าเสาดิน
8. 쁘라뚜 타루엉 ประตูท่าหลวง 
9. 쁘라뚜 타위쑤깜 ประตูท่าวิสุกรรม

10. 쁘라뚜 타크라우 ประตูท่าคราว
11. 쁘라뚜 타루어삑 ประตูท่ารั้วปีก 

출처:https://www.naewna.com/lady/514929

 

남아있는 5개의 성문

 

 

 

 

왜 갑자기 치앙쌘이었을까?

사실 갑자기는 아니었다.

할아버지 망라이가 위앙 꿈깜에 머무는 동안,

그동안 버려졌던 자신의 뿌리 응언양을 재건하라고 쌘푸에게 명령을 내린다.

(이를 토대로 응언양의 대략적인 위치가 치앙쌘 부근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 또 다른 언급으로 인해 실제로는 치앙쌘에서 북쪽으로 3키로 정도 떨어진 곳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그리하여 쌘푸는 그곳에서 한 동안 도시를 재건하며 머물렀던 것이다. 그곳에 머물면서 아무래도 자신의 본거지처럼 생각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왕위를 물려받은 후에는 3개월에 걸쳐 대대적인 공사를 한 후 수도를 이전하였다.

그렇게 치앙쌘은 란나의 수도가 되었다.

쌘푸의 도시, 치앙 쌘!

 

치앙쌘으로 수도를 이전한 쌘푸는 5년을 머물고 1334년 병으로 죽고

파야 캄푸가 4대 왕으로 즉위한다.  

 

쌘푸가 병에 걸려 죽을 때가 다가오자,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을까 귀족들은 회의를 열고,

배를 만들어 그 안에 왕의 거처를 두고 치앙쌘 앞 매콩 강변에 있는 작은 섬 부근에 띄워 다른 사람들이 왕의 위급함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기를 3일째 왕은 죽고 유해를 금항아리에 담아 2달간 강에 띄어둔다.

치앙마이에 있던 아들 파야 캄푸는 그 소식을 듣고 아들 타오 파유에게 치앙마이를 맡기고 군대를 이끌고 치앙쌘으로 와서 장례를 치루고 그 유해를 북쪽으로 3키로 정도 위 강변에 있는 오래된 도시로 가져갔다고 하는데, 이 지역이 응언양의 위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쌘푸의 유해를 강에 2달이나 띄우며 죽음을 속여야할 만큼, 

주변에서 위협하거나 바로 침입할 만한 나라, 도시가 있었을까? 

굳이 저런 식으로 강에 띄어두어야 했을까? 

 

이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란나 4대 파야 캄푸로 넘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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