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쌘 크라오는 왕위를 이을 마땅한 후계좌가 없기에 치앙 뚱과 므앙 나이의 영주(군주, 왕)들에게 치앙마이로 와 왕이 되라고 한다. 이때 치앙 뚱에서는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므앙 나이에서는 오케이하고 치앙마이로 이동하게 된다. *
이때 귀족들이 왕도 죽이는 마당에 자기들이 왕을 칭하거나 아무나 내세울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말 안들었을 경우 유배로 보내기도 하는 지역의 영주들을 왕으로 불러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왕족이 아니라면 왕이 될 생각을 갖지 말고,
귀족이 아니라면 관료가 될 생각을 하지 마라." 라고 망라이가 말했던 란나를 지배하는 신분원칙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망라이-왕후장상의-씨가-따로-있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망라이의 후손 또는 왕가 중에 그 후보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럼 므앙 나이와 치앙 뚱(켕퉁)에는 망라이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던 것일까?
이 내용은 다음 편으로...

껫쳇타랏은 암살되고,
왕이 되라고 부른 므앙 나이에서는 군대가 오고 있고,
므앙 나이를 부른 쌘 크라오 무리는 믄 후아키안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많은 피해를 본 상태에서,
치앙마이로 온 치앙쌘 무리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어 치앙쌘 무리는 루앙 프라방의 쳇타티랏이 오기 전까지 비어있는 왕의 자리는 쳇타티랏**의 외할머니인 찌라쁘라파에게 잠시 맡긴다.
이때가 1545년 6월 25일로 찌라쁘라파의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로 보고 있다.
찌라쁘라파와 이들이 함께 모의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앞서 살짝 언급한 바 있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쌘-크라오와-믄-후아키안의-싸움귀족-분란
하지만
1. 므앙 나이 영주는 치앙마이에서 왕이 될 생각으로 치앙마이로 오고 있고
2. 치앙쌘 무리가 요청한 루앙 프라방의 쳇타티랏은 일단 치앙마이로 오기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2. 쌘크라오에게 패한 믄 후아키안은 아유타야를 불러들여 아유타야도 치앙마이로 오게 된다.
먼저 도착한 것은 아유타야였다.
아유타야의 차이라차티랏ไชยราชาธิราช(재위 1534-1546)은 치앙마이로 바로 진격, 단 16일만에 치앙마이에 도착한다. 찌라쁘라파가 왕위를 맡은지 겨우 이틀정도 지난 시점이다.
치앙마이는 대비할 틈도 없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는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
찌라쁘라파는 아유타야의 왕에게 선물을 보내 싸울 의사가 없을 밝힌다.
그럼 아유타야의 왕은? 선물을 받는다=알았다. 나도 그렇다.
며칠 뒤, 찌라쁘라파는 왓 록몰리에서 그녀의 남편이자 14대 왕이었던 껫쳇타랏을 기리는 행사를 갖는데,
아유타야의 차이라차티랏은 여기에 기부를 하고 또 성수가 있는 위앙 쩻린에서 목욕을 하는 등 치앙마이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내고는 1545년 7월 11일 아유타야로 돌아간다.
한편으로는 차이라차티랏의 치앙마이 공격이 믄 후아키안의 요구에 따른 쌘 크라오의 처형에 있었기에 쌘 크라오가 이미 처형되었기에 머무르거나 싸울 이유가 없었다고도 하며, 또 찌라쁘라파가 껫쳇타랏과 결혼할 만큼의 지위를 갖춘 지역의 딸이었을텐데 어쩌면 아유타야의 왕과 친척관계였을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도 존재한다.
정확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차이라차티랏이 1534년 왕위에 오를 때,
정당한 계승이 아닌 이미 왕위를 계승한 조카를 죽이고 오른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히 쌘 크라오의 처형을 목적으로만 빠르게 치앙마이로 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귀족들간의 다툼, 비워있는 왕의 자리 그리고 란나와 아유타야간의 해묵은 오랜 감정이 더해져 치앙마이를 공격하여 점령할 마음이 분명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것을 고려하면 정확한 내용은 모르나 찌라쁘라파가 그에게 선물을 보내며 더불어 어떤 화친 전략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잠시 물러서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1545년 7월 11일 아유타야로 돌아간 차아라차티랏은 겨울 다시 치앙마이를 공격한다.
하지만 아유타야의 2차 공격 전,
잠시 잊은 사건이 있다.
그것은 므앙 나이에서도 오는 군대가 있었던 것이다.
7월 11일 아유타야 군대가 물러간 14일 후인 7월 25일,
므앙 나이는 므앙 용후아이เมืองยองห้วย와 함께 치앙마이 북쪽 치앙 쏨 지역에 도착하여 유린하기 시작한다.
열받았을 것이다.
왕이 되라고 불러놓고는 도중에 쌘 크라오가 죽으니 이도저도 아닌 상황, 어차피 가려던 길, 치앙마이의 왕 자리는 내 자리다 하며 계속 진격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은 잠시 지체된다.
그것은 치앙마이 지역에 엄청난 소음을 동반한 대형 지진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때가 1545년 7월 28일 화요일 오후 4시 반에서 6시 사이라고 한다. ***
조선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지 정확히 3개월 후, 100일 잔치도 아직 안한 시점이다.
이때 왓 쩨디루앙의 쩨디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왓 프라씽 등 여러 사원에 있는 쩨디 등의 일부가 무너진다.

이어 8월 초들어 므앙 나이 군대는 위앙 수안독에 진지를 구축하며 국지적인 전투를 벌이다가
치앙마이 해자 남서쪽 쨍꾸흐엉 부근에서 해자를 건너기 위해 대나무 다리를 건설하게 된다.
쨍꾸흐엉!
역사는 이래서 재미있다.
망라이의 막내 아들 쿤 크루아가 망라이에 의해 쫓겨났던 곳이 므앙 나이,
그렇다면 이때 므앙 나이를 이끌고 온 인물은 바로 쿤 크루아의 후손일 수도 있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쿤-크루아의-치앙마이-침공-조카야-물러나라
쿤 크루아의 치앙마이 침공 - 조카야~ 물러나라!
망라이가 죽고, 1318년 파야 차이쏭크람이 치앙라이로 돌아가면서 그의 장남 타오 쌘푸(41세) 치앙마이를 맡긴다. 천성이 착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타오 쌘푸였다. 란나 2대 왕위는 둘째 파야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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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 크루아가 반란이 실패한 후 갇혀 지내다 죽어 묻힌 곳이 바로 이 쨍꾸흐엉인데,
바로 이 부근으로 므앙 나이 군대가 다시 치앙마이를 공격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1545년 10월 8일 이들은 위앙 수안독에 설치했던 진지를 모두 불태우고 그들의 고향으로 철수하게 된다.
돌아가면 누군가 혼잣말했을 것이다.
'젠장~ 250여년 전에도 여기 와서 지고 갔는데 또 그러네.'
아무튼 권력 공백기에 왕위를 맡은 찌라쁘라파는 아유타야의 침공과 므앙 나이의 침공 모두를 막아냈던 것이다.
하지만 1545년이 지나기 전,
아유타야는 다시 공격해온다.
*개인적으로 란나에서 치앙마이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의 지도자를 영주, 군주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치앙마이에서 직접적으로 지도자로 보낸 지역을 제외하고는 사실 직접적인 영역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 각 지역의 왕이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나 치앙마이 중심세력이 약해질 경우는 언제든지 조공을 멈추고 반기를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 쳇타티랏은 루앙 프라방의 쎗타티랏을 말한다. 루앙 프라방 쎗타티랏, 태국 쳇타티랏, 란나 쩻따띠랏
*** Earthquakes in Old Lan Na : A Part of Natural Catastrophes, Hans Pe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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