쌘 크라오แสนคราว 무리는 13대 타오 차이와 그의 아버지 14대 껫쳇타랏마저 죽이며 득세를 한다.
누가 이들 무리에 맞설 수 있었을까?
껫쳇타랏에게는 부인 찌라쁘라파มหาเทวีจิรประภา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었다.
쌘크라오에게 암살당한 13대 란나 왕이었던 타오 차이와 둘째 쫌므앙เจ้าจอมเมือง 그리고 셋째 딸 엿캄팁ยอดคำทิพย์이다.
둘째 쫌므앙은 몸이 약해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지적장애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셋째 딸 엿캄팁은 란창ล้านช้าง(란쌍ລ້ານຊ້າງ)의 포티싼랏โพธิสาลราช(라오스어 ໂພທິສະລາດ포티싸랏)
과 결혼하여 차이쳇타티랏พระไชยเชษฐาธิราช(라오스어 ເສດຖາທິຣາດ쎗타티랏)을 낳은 바로 란창의 어머니이다.
왕위를 이을 마땅한 후계자가 없기에 쌘크라오แสนคราว는 치앙 뚱(켕퉁)의 영주에게 치앙마이로 와 왕이 되라고 하나 그는 뜨뜨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이어 므앙 나이의 영주를 치앙마이로 부르게 된다. 므앙 나이에서는 "오케이, 가겠소!"
이러한 상황에서 므앙 나이의 영주가 치앙마이에 도착하기 전,
람빵의 믄 쌈란아이, 치앙라이의 믄깨오หมื่นแก้ว, 치앙쌘의 믄 마니หมื่นมณี, 판เมืองพาน(치앙라이와 파야오 경계)의 믄 이หมื่นยี่ 그리고 믄 낭쓰 루앙หมื่นหนังสือหลวง 등은 치앙쌘에서 모여 란창 왕인 포티싸랏에게 사람을 보내 치앙마이도 통치해달라고 한다.
따로 치앙쌘에 모여 모의한 만큼 쌘크라오 무리와는 대립되는 세력이었을 것이다.
쌘 크라오 무리는 므앙 나이에,
치앙쌘 무리는 란창에 각각 치앙마이를 위탁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고히 하고자 한다.
란나, 치앙마이를 위한 행동이었을까? 그럴리가...
연락을 취하고 상대가 오케이한다고 해서 바로 비행기타고 몇 시간내로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두 세력으로 갈라져 므앙 나이와 란창에서 자신들의 입김이 작용할 왕을 불러오는 동안,
쌘위(hsenwi, 버마)의 믄 후아키안หมื่นหัวเคียน이 군대를 이끌고 "쌘크라오! 너 가만 안두겠어!"라며 공격해 들어온다.
이들의 소식을 들은 쌘 크라오는 각 지역의 군대를 소집, 치앙마이의 6개의 문을 지키게 한다.
(이때까지는 아직 6개이다. 성문을 하나 더 만들게 된 이야기는 아래 참조.)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아유타야-바간-승려를-스파이로-파견하여-치앙마이-파괴-주술을-걸다
아유타야, 치앙마이 파괴 주술을 걸다 1(버마 승려)
앞서 망라이가 1292년 하리푼차이를 점령할 때 스파이로 쿤 파를 심어 내부 혼란을 야기하는 전략을 사용하여 성공하였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아이-파의-활약-하리푼차이-불만-키우기?cate
chaokaoli.tistory.com
쌘 크라오가 소집한 지역은 람푼, 팡깬, 치앙르아 등의 치앙마이 주변 지역일 뿐이었다.
이렇게 보면 군사적으로는 치앙쌘 무리가 더 강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단지 힘을 갖기에는 치앙마이 성내의 정통성과 멀리 떨어져있던 지역과 세력이었기에 명목이 적었을 뿐...
3일 밤낮을 싸운 믄 후아키안과 쌘 크라오 군대의 싸움은,
쌘 크라오의 승리로 끝나고 믄 후아키안은 패퇴하여 람푼으로 도망치게 된다.
믄 후아키안은 이대로 승복하지 못하고 아유타야에 도움을 요청한다.
"치앙마이 먹기 좋은 때입니다~"
이건 뭐 치앙마이와 싸우다 지기만 하면 아유타야를 불러???
이렇게 아유타야는 또다시 란나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 이야기는 다시 다루기로 하고...
쌘 크라오와 믄 후아키안의 전투는 격력했던 만큼 양측의 사상자는 상당했는데,
앞서 군사력이 더 강했을 것으로 생각되던 치앙쌘 무리는 이때다 싶어 치앙마이로 진격, 쌘 크라오 무리를 잡아 처형하게 된다. 이때 이들에게는 명목이 있었으니 바로 쌘 크라오 무리가 껫쳇타랏을 죽이는 등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치앙쌘 무리의 진입과 성공은 껫쳇타랏의 부인이자 타오 차이의 어머니였던 찌라쁘라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란창에 치앙마이를 맡기려던 것도 찌라쁘라파의 딸이 왕비로 있기 때문일테고...
따라서 찌라쁘라파가 쌘 크라오 무리와 맞서 시기와 기회를 보며 치앙쌘 무리와 모의하지 않았을까?
또한 그러했기에 란창에서 손자 쎗타티랏이 치앙마이로 오기 전까지 란나의 15대 여왕으로서 추대되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귀족들간의 내분은 치앙쌘 무리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믄 후아키안이 부른 아유타야 그리고 쌘 크라오가 불렀던 므앙 나이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이 모두가 1545년에 벌어진 일들이다.
어수선한 시국에 벌어지게 될 전쟁들,
찌라쁘라파 여왕은 이 위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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