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는 남쪽에 치앙마이 게이트ประตูเชียงใหม่가 있다.
이 문을 통과하여 그대로 가면 람푼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이 치앙마이 게이트가 다른 지역에도 있는데,
그 한 지역이 바로 치앙라이이다.
치앙라이 남서쪽에 존재하고 있다.
흔적만 남아있지만
마이ใหม่란 뜻이 새로운이란 의미가 있어 새로 지은 문인 동시에
이 치앙마이 게이트를 통과하여 그대로 가면 람푼이 아닌 바로 치앙마이로 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치앙마이 게이트! 쁘라뚜 치앙마이ประตูเชียงใหม่
이 이름이 슬픈 역사를 가질 수 있을까?
쁘라뚜 치앙마이가 한 곳에 더 있다.
그곳은 바로 바고(파코, 파고, 홍싸와디, 한타와디)이다.
이곳은 망라이가 "너희 먹으러 갈 것이다. 기다려라"하고 갔다가 파코 부인(낭 파이코)와 금은세공인 등 다양한 인력들을 데려온 곳인데, 두 번째 등장은 치앙마이가 먹히고 난 후의 이야기다.
1500년대 초반 버마에는 걸출한 인물, 바인나웅이 등장하여 버마를 정리하고 주변 지역을 차례차례 먹어나간다. 이때 란나와 아유타야도 버마에게 먹히고 마는데, 란나가 먹힌 년도는 1558년! 망라이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당시 정복전쟁은 인력 수급도 한 몫하게 되는데, 란나 치앙마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간다.
바인나웅(부렝넝บุเรงนอง)은 수도를 바고로 옮긴 후 1566년 20개의 문을 가진 깜포짜타니(กัมโพชธานี(태국어 발음), 칸바자타디) 초호화 왕궁을 건설하게 된다.
최전성기 시절의 왕궁이었는데, 이 20개의 문 중 하나가 바로 쁘라뚜 치앙마이이다.
왜 쁘라뚜 치앙마이라고 했을까?
바고에서 보면 치앙마이는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럼 치앙마이 방향의 북동쪽 문을 담당했을까?
아니다.
치앙마이 게이트는 남쪽에 있었다.
남동쪽의 아유타야에서 잡아온 사람들은 북쪽의 문을 담당했고,
북동쪽의 치앙마이에서 잡아온 포로들은 남쪽의 문을 담당했는데,
각 문은 방향이 아닌 포로로 잡아온 지역 사람들에게 공사를 맡겨 그 지역의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따라서 쁘라뚜 치앙마이는 치앙마이에서 잡아온 포로들이 만들었던 문
치앙마이와 치앙라이에 있는 쁘라뚜 치앙마이와는 달리
바고에 있는 쁘라뚜 치앙마이는 포로 생활을 하던 치앙마이인들의 눈물이 담긴 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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