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는 쑤코타이의 람캄행과 파야오의 응암 므앙의 머리를 모아 건설했다.
삼국의 삼총사의 머리를 맞댄 결과가 바로 치앙마이 도시건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삼총사는 당시 롭부리에서 함께 공부했던 유학파들로 당시는 크메르의 전성기 시절이었다.
1238(39)년 생들이니 크메르 자야바르만7세가 죽고 20년 정도 뒤의 인물들로
이들은 크메르 문화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치앙마이-도시-완공-1296년-4월-19일-0400?category=1022436
특히 북부 란나 지역보다는 쑤코타이가 그 영향을 더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쑤코타이(동서 2키로, 남북 1.6 키로)와 치앙마이(동서 1.8키로, 남북 2키로)의 정사각형인듯 정사각형같은 정사각형 아닌 도시를 보면서 문득 크메르가 떠올라 앙코르 톰(동서남북 3키로 정사각형)을 찾아보았다.
정사각형의 크메르 우주관을 담았다는 앙코르 콤,
쑤코타이와 치앙마이 역시 비슷한 개념을 담아 도시를 건설했다.
그렇다면 람캄행의 쑤코타이가 크메르의 영향을 받아 앙코르 톰을 따라 건설하고
이어 치앙마이는 람캄행의 견해를 받아들여 건설하게 된 것이 된다.
망라이는 4키로의 보다 큰 도시를 원했다.
하지만 람캄행과 응암 므앙의 반대가 있었는데,
람캄행의 의견은 너무 큰 도시는 방어에 어려움이 있다였다.
응암 므앙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나는 응암 므앙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라 본다.
'가만 망라이가 여기에 대도시를 건설하면 그 도시를 거점으로 주변으로 더 확장해나갈 텐데 그렇다면 우리 파야오도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 20년 전에도 우리 경계 지역으로 망라이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식겁해서 500가구나 넘겨주었는데 나중에 내가 죽고 또 쳐들어오면 곤란하지. 반대해야겠다.'
"라이! 나도 반대야. 4키로는 너무 큰 도시야. 절반으로 줄이면 좋겠네."
아무리 친구라지만 서로의 국가적 이해관계는 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란나-망라이-파야오-응암므앙-그리고-쑤코타이-람캄행-1?category=1022436
특히 쑤코타이와 치앙마이는 쌍둥이처럼 닮았는데
위치적으로도 동쪽에는 산을, 서쪽에는 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치앙마이는 삥강에서 거리를 더 두고 있는데
이는 이전의 도시들을 보면 모두 성벽의 한 축을 강으로 두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망라이는 이미 위앙 꿈깜에서 홍수의 피해가 극심했기에 강을 한 축으로 두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쪽의 강에서 나오는 물,
그리고 동쪽의 산에서 나오는 물로 수원을 한쪽에만 두지 않았다는 것도 같다.
치앙마이의 풍부한 물은 이미 소개한 적이 있다.
여행자에게도 유명한 치앙마이 대학 내의 앙깨오도 이 물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치앙마이가-새로운-도읍지로-적합한-7가지-상서로운-조건들?category=1022436
크메르의 앙코르 톰, 쑤코타이 그리고 치앙마이 13세기에서 14세기를 걸쳐 흐르는 역사와 문화의 흐름이다.
앙코르 톰은 앙코르가 도시, 톰이 크다란 말이니 태국어로 하면 므앙 야이, 나콘 야이가 되겠다.
하지만 깜므앙(북부 란나)말로 하자면 치앙야이 เชียงใหญ่(찌앙야이เจียงใหญ่)가 된다.
물론 치앙야이로 검색해도 앙코르 톰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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