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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중앙 시장에서 벼락을 맞아 죽은 망라이,
치앙라이에 있던 둘째 아들 차이쏭크람은 소식을 듣자마자 대군을 이끌고 치앙마이로 들어온다.
그리고는 장례를 치르고,
4개월 후 치앙마이는 아들 쌘푸에게 맡기고 치앙라이로 돌아간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망라이의-죽음-치앙마이-시장-한-가운데서-벼락을-맞다?category=1022437
이때 망라이의 유해는 어디에 안치했을까?
치앙마이 벼락을 맞고 죽은 자리에 쩨디를 세우고 안치했을까?
망라이를 위해 새로운 쩨디나 사원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렇다면...?
차이쏭크람이 치앙라이로 돌아가며 망라이의 유해를 가지고 갔다.
치앙마이는 새로운 도시임에는 틀림없으나 아무래도 치앙라이가 더 고향같은 이미지의 도시가 아니었을까?
응언양때부터 함께 해왔던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1317년 같은 해(난 1317년으로 보고 있다.)
치앙라이로 아버지의 유해를 가져 온 차이쏭크람은,
도이 응암므앙ดอยงำเมือง의 왓 응암므앙วัดงำเมือง 앞에 불탑을 지어 아버지 망라이의 유해를 안치한다.
이곳이 바로 꾸 프라짜오 멩라이กู่พระเจ้าเม็งราย다.
꾸กู่ 캄므앙(깜므암, 란나어)으로, 쩨디เจดีย์와 같은 말이다.
왓 응암므앙은 후대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에는 망라이 유해를 안치한 꾸กู่ 하나만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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