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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나 역사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ล้านนา95

띨로까랏, 자신을 우롱한 난น่าน을 정복하다. 란나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는 띨로까랏인 만큼, 그의 재위기인 1441-1487년 46년간은 전쟁이 일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쪽 중국에서는 명나라 3대부터 8대까지 6명의 황제가 바뀌는 상황에서 서쪽은 란나의 띨로까랏이 서쪽의 왕ราชาแห่งทิศตะวันตก으로 불리우며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1442년 아유타야와의 1차 전쟁을 거친 후 란나 치앙마이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루앙 프라방까지 북쪽으로는 쳉훙(치앙 룽)의 운남지역과 버마 샨 지역 그리고 남쪽으로는 랍래, 피싸눌룩 등까지 퍼져나가며 명실공히 태국 북부, 버마동부, 중국남부와 라오스 북부 등에 걸쳐 란나 최대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모두를 다룰 필요는 없어보이고, 우선 몇몇 전쟁만 다루어보자. 우선 난น่าน이다. 시비는 난이 먼저 .. 2022. 3. 31.
망라이의 유해는 어디에 묻혀있나? 치앙마이 중앙 시장에서 벼락을 맞아 죽은 망라이, 치앙라이에 있던 둘째 아들 차이쏭크람은 소식을 듣자마자 대군을 이끌고 치앙마이로 들어온다. 그리고는 장례를 치르고, 4개월 후 치앙마이는 아들 쌘푸에게 맡기고 치앙라이로 돌아간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망라이의-죽음-치앙마이-시장-한-가운데서-벼락을-맞다?category=1022437 망라이의 죽음-치앙마이 시장 한 가운데서 벼락을 맞다! 궁전에서 나와 코끼리를 타고 치앙마이 시장을 둘러보던 망라이는, 갑자기 내리친 벼락에 맞아 죽고만다. 시대를 풍미한 영웅다운 죽음이었을까 아니면 영웅답지 않은 초라한 죽음이었을까? 이 chaokaoli.tistory.com 이때 망라이의 유해는 어디에 안치했을까? 치앙마이 벼락.. 2022. 3. 29.
망라이가 벼락을 맞은 시장은 어디일까? 망라이가 여러 저주의 이유로 벼락을 맞았다고 하는 장소는 어디일까? 치앙마이 전설ตำนานพื้นเมืองเชียงใหม่에 따르면, 그는 80세에 시내 한 복판의 시장에서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중앙 시장이라고 하면 되겠군. 현재 치앙마이의 삼왕상이나 유빠랏 학교 부근이라고 하나, 실제 조금 더 자세하게는 선데이 마켓이 열리는 도로를 타패에서부터 따라 내려오다 보면 보이는 야마하 매장 건너편이라 할 수 있다. (1번 지점) 그 자리에 망라이 사당을 세워두었으나 개인 소유지라 접근의 어려움이 있어 야마하 사거리에 새로 사당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2번 지점) 사거리에 새로 만든 망라이 사원은 도시 기둥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도시 기둥하니 갑자기 생각난 것이, 실제 치앙마이 도시 기둥(인타킨)은 .. 2022. 3. 27.
망라이가 벼락을 맞아 죽은 이유(저주의 이유) 1311년(또는 1317년) 시장을 둘러보다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망라이, 사람들은 망라이가 벼락을 맞을 만한 일을 해서 죽었다고 하는데 어떤 일이었을까? 1. 1275년 벌어진 장남 쿤 크르앙을 반란 혐의로 자신이 있는 팡으로 불러오면서 중간에 부하를 시켜 죽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쿤 크르앙의 엄마이자 망라이의 부인인 우아밍 위앙차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런데 이 부인을 슬프하게 사건이 더 일어난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망라이의-장남-쿤-크르앙의-반란?category=1022436 2022. 3. 24.
띨로까랏, 아유타야와 첫 전투를 시작하다. 아유타야 보롬마라차티랏 2세에게 치앙마이를 공격해달라고 비밀리에 편지를 보낸 므앙 텅의 군주, 믄 쌈 크라이한은 무사했을까? 믄 록 쌈란이 팡에서 아직 치앙마이로 돌아오기 전, 아유타야의 보롬마라차티랏 2세는 이미 치앙마이 남서쪽 쫌통까지 도착해있는 상황이었다. 빨리도 왔다. 믄 록 쌈란이 치앙마이에 도착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아유타야를 상대해야만 했다. 띨로까랏이 가장 믿는 그였다. "흥분하지 마시고, 걱정하지 마시고 팡에서 막 돌아온 제 군사들에게 뭐 좀 챙겨주십시요. 제가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띨로까랏이 그의 군사들에게 은 등을 선물하며 달래는 동안, 믄 록 쌈란은 치앙마이로 불러들인 므앙 텅의 군주인 믄 쌈 크라이 한과 이야기를 나눈다. "아유타야가 어찌하여 우리를 공격하려하는지 모르겠구만. .. 2022. 3. 21.
란나ล้านนา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 백만개의 논이라는 란나ล้านนา, 란나, 란나하는데 누가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궁금했다. 란나라는 이름은, 국호(?)는 누가 언제부터 사용했는가? 망라이가 응언양 25대 왕으로 즉위하고 치앙라이나 치앙마이로 옮긴 후 "이제부터 우리 나라는 란나로 부를 것이다. 내가 란나 1대 왕이다!"라고 하지도 않았을테고 말이다. 그럼 란나라는 이름은 언제부터일까? 현재 태국 내에서 발견된 란나라는 이름은 155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비석에서 처음 발견된다. 1553년이면 매쿠 왕พญาแม่กุ때로 버마에 먹히기 겨우 5년 전이다. 그간 란나ล้านนา와 이 란나ลานนา를 같이 사용해왔으나 1980년 한스 펜스가 치앙라이주 치앙콩에서 발견된 왓치앙싸 비문ศิลาจารึกวัดเชียงสา에서 란창ล้านช้า.. 2022. 3. 20.
띨로까랏, 막내 이복동생을 죽이다. 쌈덱요이 문제를 해결한 띨로까랏에게는 아직 남은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므앙 쌋으로 보낸 아버지 쌈팡깬(이때는 쌈매나이)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없앨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믄 록 쌈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고 싶었다.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던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쌈팡깬을 따르는 반란세력들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부하를 므앙 쌋으로 보내 쌈팡깬을 잡아오도록 했다. 그때 팡을 다스리고 있던 인물은 쌈팡깬의 막내 아들 타오 써이였다. 그는 여섯째 형 띨로까랏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따라서 형을 몰아내고 아버지를 다시 치앙마이의 왕으로 세우고자 했다. 자신이 왕이 되고자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믄 록 쌈란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하지만 쌈팡깬은 "막내.. 2022. 3. 18.
란나 망라이 왕조 역대 왕들의 연대기(치앙마이연대기, 치나깐말리 등) 버마 침입 전까지의 란나 망라이 왕조 역대 왕들의 연도를 정리해 보았다. 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연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니 대충의 시기만 파악해두기 위해서이다. 치나깐말리빠껀은 짜마테위웡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주로 다루는 가운데 란나 왕은 1516년 초까지만 기술되어 있고, 치앙마이 연대기는 1578년 위쑷티테위พระนางวิสุทธิเทวี까지 나와있다. 란나 17대 매꾸แมกุ 왕은, 므앙 나이로 쫓겨났다가 망라이가 죽은 후 쌘푸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망라이의 셋째 아들 쿤 크르아의 후손이다. 므앙 나이에 있던 그를 불러 란나의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https://chaokaoli.tistory.com/entry/쿤-크루아의-치앙마이-침공-조카야-물러나라?category=1022437 쿤 크루아의 치앙.. 2022. 3. 16.
라와족과 개를 앞세우며 진행된 란나 왕위 즉위식 란나 9대 왕 띨로까랏까지 이야기가 진행 중으로 왕이 바뀔 때마다 즉위식을 했을텐데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마다 1. 먼저 왕은 도시를 맨발로 돌아다닌 후 2. 쁘라뚜 후아 위앙(지금의 창프악 게이트)를 통해 도시로 들어간다. 3. 이때 라와족(루아족) 사람과 개를 앞세운다. 4. 도시로 들어가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다. 5. 머리에 물을 붓는 행위로 정화의식이 진행된다. 6. 망라이 왕조 이전 라오 왕조의 초대 라오 쫑 시대부터 내려오는 3가지 왕권의 상징을 전해받는다. 7. 그것은 영광의 검, 창 그리고 씨칸차이สรีกัญไชย 단검이다. 8. 치앙마이 연대기에는 여기에 더해서 상서로운 보석까지 합하여 4가지가 있다고 나온다. 머리에 물을 붓는 행위는 목욕과 함께 하기도 하지만 8.. 2022.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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